2022년~2023년 일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 '시작'을 정리하다
[D-335] 그때가 좋았지
'지금을 즐겨, 나중에는 그때가 좋았지~ 하고 생각날 거라고 하더라고요'
같은 아파트 입주민이자, 육아 동기이자, 비슷한 직업의 길을 걷는 18층 아이 엄마가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이 생각날 거라니. 제발 일하고 싶어지는 이 마음이 잊힐 거라니.
출산 휴가까지 합하여 27개월의 시간을 아이의 엄마로만 살았다. 축복받은 시간이라 생각했었다.
아이가 13개월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고집과 떼에 차라리 어린이집에 보낼까를 고민만 하다 심리상담을, 정확히는 육아 상담을 받으며 육아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다.
아이와 둘이 제주도에서 복닥거리며 한 달을 보내며 아이의 엄마로만 사는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는 18개월부터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고 드디어 나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나를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때부터였다. 아이의 엄마가 아닌 삶을 상상해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 동기이며, 동료 교사이자 친구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딩크를 선언하고 능력과 노력이라는 날개를 달아 훨훨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복직만 한다면. 내가 일을 시작하기만 한다면.
[D-32] 미라클모닝
복직 한 달 전, 2023년 2월부터 괜스레 들뜬 마음에 미라클모닝도 시작했다. 일하게 되면 내 시간이 없어질 테니까, 책 읽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시간을 확보해 놓고 싶었다. 복직 연수를 들은 것 만으로 전문직이 된 거 같았고 희망과 욕심, 자신감이 넘쳐났다. 인수인계를 받는 날, 처음 맡아보는 업무에 그저 빙구 미소만 지었으나 어찌어찌 잘 해결이 될 거라 믿었다.
[D-DAY] 기절
대망의 복직일이 밝았다. 2년 만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잠은 설쳤으나 의외로 정신은 또렷했다. 아침 6시 20분에 나선 출근길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퇴근길에는 좀 멍했던 거 같다. 저녁 8시 30분쯤 집에 도착했고, 아이를 재우다 먼저 잠이 들어 버렸다.
[D+46] 00반은 좋겠어요
벚꽃축제를 열었다. 빨대블록으로 꽃터널을 만들고, 포토존을 꾸몄다. 꽃가루를 만들어 뿌리고 기념 선물(종이꽃)도 접어 나누어 주었다. 만 5세 유아들을 맡다 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돌봄과 교육 어딘가에 있던 교사라는 내 위치가 드디어 정확하게 교육으로 간 느낌이었다.
내가 교사라는 게 실감이 났다. 방역인력 선생님이 말했다.
"유치원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니까 분위기가 달라지네. 00반은 좋겠어요."
[D+60] 우리 아이가 제일 늦게 하원해
내 복직 이후로 쭉- 직장이 먼 내 대신 남편이 아이의 등하원을 책임지고 있다. 두어 달 되니 일에 적응을 했는지 아이가, 궁금해졌다.
그날도 저녁 8시 30분쯤 집에 도착했고, 엄마를 반갑게 맞이하고 아빠와 함께 책을 마저 읽으려는 모습에 새삼 기분이 이상해져 늦은 밤, 아이를 재우다 조심스럽게 카톡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아이 어린이집은 잘 다니는 거 같아? 나 안 찾아?"
"... 우리 아이가 제일 늦게 하원해. 데리러 가면 혼자 남아 있어. 3월에는 아빠를 좀 찾았는데 이젠 딱히 엄마 아빠를 기다리진 않는대."
코끝이 찡긋하고 눈이 시큼했던 거 같다.
[D+87] 저 그 연수 듣고 싶어요
만 5세 유아들의 놀이를 확장하고 지원하기 위한 교사의 방법 중에서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 제일 부족한 부분은 '디지털' 쪽이었다. 마침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유아들을 고려한 '놀이중심 교육과정에서 디지털로 놀이하기'라는 교사 연수가 15:00~17:00까지 있다고 한다. 2시간이나 행정업무를 못 처리하면 그만큼 늦게 퇴근하는 거긴 하지만, 교사라면! 배움과 성장을 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D+118] 아이 사진이 없네
내가 나 자신을 과대 평가했나 보다. 여전히 퇴근은 늦고, 육아 시간은 단 하루만 사용했다. 이번 달 놀이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해 두려고 핸드폰의 갤러리 앱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쭉 훑어 내리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아이 사진은 어디에 있지......?
[D+135] 행정업무
"정말 죄송한데 저 급식비 계산하다가 잘 모르겠어서요...."
친환경무상급식비를 계산하다가 머리가 터질 뻔했다. 근데 2022학년도 회계 감사(서면)와 2023학년도 정보공시 점검이 나온단다. 이 모두가 내 일이다. 8시 30분까지 출근, 9시부터 13시 30분까지 수업, 16시 30분에 퇴근. 공식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행정업무 시간은 3시간이다.
그중 최소 30분 정도는 학부모와 통화를 하는데 쓴다. 2시간 30분으로 저 많은 행정업무 처리가 가능한가? 그럼 우리 반 수업 준비는 언제 하지? 교사라면, 이 모든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내 가족과 내 시간을 희생해야 마땅한 건가?
'워킹맘은 어쩔 수가 없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이 훌쩍 커 있더라고.'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순간 훌쩍 커 있는 아이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싶다. 이 마음이, 내가 내 직업에 회의를 가지게 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