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옥토넛!
2024년 '강릉 2주 살기'를 추억하기 위해 매번 사진첩을 들여다 보기도 귀찮지만(심지어 정리도 안 해놨다.), '강릉'이라는 지명 외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글퍼졌다. (심지어 아이에게는 '강릉(지명)'과 '바다 물놀이'정도만 기억 어딘가에 남은 거 같다.)
기억력도 좋지 않고, 사진도 잘 챙겨 찍지 않는 귀차니즘에 기록마저도 안 한다면! 나이가 들어 먹을 추억이 없을 게 분명하기에 적어도 2025 '속초 2주 살기'는 제때 기록해 보자는 목표를 야심 차게 세웠다.
기록은 같이 할 때 더 빛이 나는 법. 나의 속초 일지를 만들며 아이 것도 함께 만들어두었다. hoxy 복덩이도 하고 싶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예측했으나 강도가 덜한 실수를 했던 속초의 첫날 밤. 잠을 못 이루는 아이와 씨름하기 싫어, 침대가 있는 메인방을 벗어나 작은 거실 한 켠에 마련된 2인용 식탁에 앉았다. 뭐라도 해야 치밀어 오르는 피로와 짜증을 누를 수 있겠다 싶어 달력 형식으로 만들어 온 '2025 속초 일지'에 끄적끄적 오늘 한 일, 쓴 돈, 감정 등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방에서 이것저것 뒤져보며 할 것을 찾던 복덩이는 슬쩍 무언가를 챙겨 방과 거실을 나누는 간이문을 천천히, 보란 듯이 넘어왔다.
"아, 복덩이도 공부할라고."
묘하게 당당하고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손에 있던 활동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던 복덩이는 내가 쓰는 일지에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근데, 엄마는 뭐 해?"
평소 노트북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두드리거나, 책을 읽던 모습과는 다르게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퍽 신선해 보였던지 관심을 가지길래
"오늘 하루를 기록하는 거야. 나중에 또 볼라고."
라고 눈을 맞추며 친절하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한 후, 다시 일지에 하루를 적어나가는데 갑자기 복덩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엄마는 좋겠다. 복덩이는 쓸 수가 없어서 그런 거 못 해."
"...... 그럼 그림으로 그리면 되잖아. 엄마는 글자로, 복덩이는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면 되지."
"오! 좋은 생각인데?"
화색이 도는 얼굴로 부산스럽게 본인 보다 한참 큰 식탁 의자에서 내려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여행 가방에서 사인펜 세트를 꺼냈다. 고심하며 검은색 사인펜을 꺼내더니 또 작은 속초집을 꽤나 이상하게 뒤지고 다니며(침대 이불 들추어보기, 정수기 옆 살펴보기, 화장대 건드려보기 등) 다급한 목소리로 또 말했다.
"엄마, 복덩이도 엄마처럼 할 건데, 종이가 없어."
아, 맙소사. 내가 준비한 걸 첫날부터 꺼내게 될 줄이야!
그치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너무 들떠보이지 않게 담백한 말과 표정으로
"와, 복덩이도 엄마처럼 하루를 기록하려고 했구나. 그럼 우리 나중에 서로가 적은 거 같이 보면 재밌겠다."
라고 말하며 물 흐르듯이 미리 준비해 간 복덩이 버전의 속초 일지를 꺼내어 보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사인펜이 복덩이 버전 속초 일지에 안착하는 것을 본 후, 다시 나는 내 일지에 집중하는 척을 하며 눈으로는 초조하게 복덩이의 손을 쫓았다.
날짜와 날씨가 적힌 칸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복덩이의 손은 이내 그 밑에 있는 네모 칸에 십자 모양을 그었다. 나지막이 속으로 탄성을 흘려보내며 더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복덩이는 꾹 다문 입술과 진지한 눈썹을 보이며 본인이 그린 일지를 내 앞에 슥 던졌다.
그렇다, 복덩이는 계획이 있었다. 십자 모양은 칸을 나누기 위함이었고 오늘 한 것이 한 칸에 하나씩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물론, 그림의 퀄리티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엄마, 정말 깜짝 놀랐어. 이건 딱 보니까 복덩이랑 엄마가 나란히 있는 거네!? 그럼 그 옆에는 뭐 하는 모습이야?"
식탁 위에 맞댄 머리 위로 오밀조밀한 입을 움직이며 복덩이는 열심히 설명했다.
"아아- 그건 복덩이가 옥토넛을 보는 거야."*
"...... 응?"
"엄마가 아까 옥토넛 보여줬잖아. 엄청 재밌었어."
<옥토넛: 바다 탐험대 옥토넛 / 어린이 애니메이션>
"아, 세상에 옥토넛이 그렇게 재밌었구나....... 그럼 오늘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뭐야?"
"당연히 옥토넛이지!...... 아, 아빠랑 물놀이도 재밌었어"(속초 출발 전, 원활한 운전을 위하여 복덩이의 힘을 빼기 위해 아침부터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물놀이 한판을 뛰었다.)
복덩이는 내심 후련한 얼굴로
"그럼, 이제 나는 다른 공부하러 갈게. 와- 힘들었네."
라며 식탁 의자를 벗어났다. 속초에 도착해 걸었던 오늘의 바다는, 짧지만 강렬했던 오늘의 모래 놀이는 그렇게 삭제되었다.
아직 많은 날이 남아있으니 괜찮다,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옥토넛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한다.
그래도 되었다, 서로 다른 기억일지라도 속초를 추억할 거리가 벌써 생겼으니 말이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k-관광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