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길었고, 여름 옷장은 망했다.
올해 여름은 참 길었다. 기후변화로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5월 첫 주가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기온이 쭉쭉 솟구쳐 오르고 갑자기 여름이 돼버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333’은 3개월 동안 33개 의류 아이템만 입고 쓰며 사는 것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듯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하다. 게다가 봄은 3~5월, 여름은 6~8월, 가을은 9~11월, 겨울은 12~2월로, 각 계절이 대략 3개월 정도라 프로젝트 333을 하기에 참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여름이 일찍 찾아와 5월 중순부터 여름 옷장을 시작하긴 했지만, 9월이 되면 가을 옷장을 만들어 사용할 거라 생각했다. 가벼운 여름 옷만큼이나 가볍게, 그리고 쉽게 만든 여름 옷장이었다. 그런데 이 여름 옷장의 옷을 거의 10월 초까지, 거진 5개월 동안이나 입었다. 여름이 3개월이 아니라 5개월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여름 옷장은 절반은 실패했고, 입을 옷이 적어 체감 기간은 더 길었다. 길고 긴 여름을 지내며 내가 입은 옷과 안 입은 옷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 입은 옷과 안 입은 옷
여름 옷장에서 신발, 가방, 선글라스, 모자 등을 빼고 옷만 세면 총 23벌이다. 이 중 상의가 12벌, 하의가 6벌, 원피스 3벌, 겉옷 2벌이다. 여름 옷장을 만들며 추리고 또 추린 옷들이었지만, 이 중 상의 4벌(조끼 1, 민소매T 1, 긴팔T 1, 겉옷 1)은 한 번도 입지 않았다. 또 다른 옷 5벌(두께감 있는 5부T 1, 원피스 2, 청바지 1, 바람막이 겉옷 1)은 2~3번 밖에 입지 않았다. 한 번도 안 입은 옷과 거의 입지 않은 옷을 빼면 내가 5개월 동안 입은 옷은 상의 8벌(블라우스 2, 반팔T 6), 하의 5벌(반바지 2, 9부 바지 1, 통바지 1, 치마 1), 원피스 1벌, 총 14벌이다.
5개월의 여름 동안 4개월 조금 넘게는 출근을, 3주 정도는 재택 근무를 했다. 회사에 허벅지까지 오는 반바지와 알로하 노란 티셔츠, 진분홍 기념 티셔츠를 입고 갈 수는 없어, 출근하는 4개월 동안 하의 3벌(9부 바지 1, 통바지 1, 치마 1)과 상의 6벌, 원피스 1벌로 지냈다.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내가 입은 옷이 정말 적어 나도 놀랬다. 정말 잘 버텼구나 싶어 마구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이렇게 옷이 적어 힘들었는데도, 내가 입지 않은 옷은 어떤 옷일까?
2. 모셔야 하는 옷은 손이 안 간다.
난 다림질을 무척 귀찮아한다. 다려야 하는 옷도 세탁하고 탁탁 털어 말려 그냥 입는다. 다려야 폼이 나는 옷도 그냥 입는데, 마 100%, 린넨 100% 요런 애들은 한 번만 입고 나갔다 돌아오면 도저히 다리지 않고는 입을 수 없는 대왕주름이 생겼다. 그래서 마 100%와 린넨 100% 옷은 일찌감치 내 옷장에서 멸종되었다. 다림질을 싫어해 옷을 살 때 손으로 한 번 옷을 쥐어보고 구김의 정도를 살피는 습관도 있다. 순면 옷을 좋아하지만, 블라우스와 셔츠 같이 좀 갖춰 입는 옷이 면 100%면 정말 고민을 많이 한다. 다리미를 안 든지 10년은 넘은 것 같다.
내가 다림질을 거의 안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름을 지나며 세탁기로 세탁할 수 없는 옷은 내가 잘 안 입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 여름엔 입을 옷이 참 적었는데도 손세탁을 해야 하는 옷이나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옷은 손이 잘 안 갔다. 세탁의 번거로움은 내게 꽤 무거웠다. 입으려 들었다가도 특별하게 세탁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려 놓고, 세탁기로 막 돌려 입을 수 있는 옷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나에게 옷은 애지중지할 대상이나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나에게 좋은 옷은 세탁기로 쉽게 세탁할 수 있고 다림질이 필요 없는, 관리가 편한 옷이다. 특히 여름은 옷을 자주 세탁해야 하기 때문에 세탁의 편리함이 더 중요했다.
3. 실제 여름은 내 생각보다 덥고, 긴 옷은 거의 입지 않는다.
여름은 역시 더웠다. 이제는 어딜 들어가도 에어컨을 틀어 얇은 긴팔 옷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 에어컨이 좀 후덥지근하다.) 내가 한 번도 입지 않거나 거의 입지 않은 옷은 조금이라도 두껍거나 긴팔 옷이었다. 예전엔 봄 가을 입고 다니던 청바지를 여름에도 잘만 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내가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여름에 청바지는 보기만 해도 너무 덥고 무거웠다. 봄에 잘 입은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살짝 도톰한 티셔츠도 손이 안 갔다. 조끼도 더워서 안 입었다. 장마나 태풍이 올 때 입으려고 준비한 긴팔 티셔츠와 겉옷 1벌도 손도 안 댔다.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 여름은 무척 덥고, 반팔을 넘어가는 상의와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옷은 내가 입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름에 보온을 위한 옷은 긴팔 바람막이 1벌이면 충분할 것 같다. (정말 잘 쳐주면 얇은 긴팔 가디건 하나를 더 보탤 수 있다.)
4.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와 몸에 붙는 티셔츠는 좀 불편하다.
여름에 짧은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는 것을 참 좋아한다.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것도 참 좋아한다. 한 때 짧은 치마도 즐겨 입었다. 이번 여름 옷장에 내게 잘 어울렸고 아꼈던 원피스를 포함했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이지만, 좋은 옷을 자주 입어야지 하는 생각에 넣었다. 하지만 한 번인가 두 번 입고 입지 않았다. 세탁의 귀찮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간 치마가 생각보다 많이 어색했다. 도망가는 아이를 뛰어가 잡고 넘어져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기에도 불편했다.
아줌마가 되고 나니 몸에 붙는 티셔츠도 불편해졌다. 배에 힘을 좀 줘야 하는데, 이젠 힘을 줘도 배가 잘 들어가지도 않고 배에 힘주는 데까지 신경이 가지 못한다. 몸에 붙는 티셔츠가 노랑과 빨강이라 나 혼자 더 부끄러워 했다. 옷에 대한 센스가 별로 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프로젝트 333을 하며 나의 필요와 스타일을 많이 알게 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변한 것도 보여 뭔가 살짝 씁쓸한 기분도 든다. 젊은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젊음이 지나 저 멀리 가는 걸 보면 그 때의 나와도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두 번의 프로젝트 333 옷장을 만들어 입으며 지금의 내게 좋은 옷은 관리가 편한 옷이고, 1벌의 상의는 적어도 3벌의 하의와 무난히 잘 어울려야 옷장에 넣을만 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길었던 여름처럼 이 글도 긴 시간이 걸렸다. 이걸로 여름 옷장은 안녕이다. 여름 동안 잘 버티고 잘 경험한 내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