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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Dec 23. 2021

학생 23명 vs 선생님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공기 시합 한 판. 과연 승자는?

한참을 거리 두기를 이유로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놀지 않을 아이들은 아니지만 하지 말라는 것은 자꾸만 더 하고 싶은 법. 놀거리가 없는 아이들의 몸 장난이 점점 더 심해졌다. 올라타고 업히고 때리고 붙잡고 밀고 당기고... 거리 두기는커녕 자석 S극과 N극처럼 더 달라붙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으니 바로 불허하던 보드게임을 허락한 것. 모이기는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기라도 하니 몸 장난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보드게임이 어디 10분 만에 끝날 수 있는 것이었던가? 화장실 가기를 포기하고 그 시간에 보드게임을 하다 쉬는 시간 종료 알람을 듣고 부랴부랴 정리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그러면서 수업 시작하면 화장실을 보내달라니, 아무리 재미있는 보드게임이라도 이 정도면 주객전도였기에 다시 고심하다 문득 공기놀이가 떠올랐다. 공기알 다섯 개만 있으면 되니 시작하고 정리하기도 좋고 손가락 근육 발달과 순발력 발달 등 얼핏 생각해도 장점이 많았다. 그래서 200알이나 들어 있는 거대한 공기를 사두었더니 없던 건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아이들이 바 관심을 보이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연습 하루 만에 선생님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다


어느 날 하교 시간이 지났는데 남학생 3명이 집에 안 가고 남아서는 내게 기를 하자고 요청해왔다.


"선생님, 저희랑 공기 10점 내기해요!"


10점이라고? 너무 귀여워서 피식하고 웃음이 다.


"얘들아, 내기 못 하겠는데?"

"왜요?"

"그건 한 번 만에 낼 수 있는 점수잖아."

"진짜요?"


그래서 십몇 년 만일까.. 정말 오랜만에 공기알을 잡고 1단부터 시작을 했는데, 5단계까지 죽지도 않고 돌진하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떼는 말이야 공기알 한 번 잡으면 50점까지 직진이었어. 연습 좀 더 하고 시 와! 그렇게 첫 번째 내기 신청은 없던 것으로.



전학 온 오 남매의 막내, 공기놀이 다크호스로 떠오르다


2학기에 새로 전학 온 여학생이 있었다. 아이들의 관심은 특별히 아이가 오 남매의 막내라는 데 집중됐다. 오빠가 3명에 고등학생 언니까지 있다고 하니 대부분의 다른 여학생들이 부럽다고 난리가 났다. 그림 그리기도 잘하고 손재주가 두루 좋은 아이였다. 그런데 공기놀이를 하고 나니 아이들이 내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예진이 선생님만큼 진짜 잘해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기를 처음 해보는 것에 반해 예진이는 이미 언니 오빠들과 연습해 본 실력이 있어 내가 봐도 상당히 베테랑이었다. 이제 다른 아이들은 도전 상대를 내가 아닌 예진이로 정하고 연습 모드에 돌입했다.



1회 공기 대회를 개최하다


날씨가 추워져 운동장 체육 활동이 힘들어진 탓도 있고 전원이 동시에 하는 교실 체육 활동을 하면 너무나 괴성을 질러대는 탓에 감당이 되지 않아 여러 모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체육 수업 중 여가 활동으로 전통 놀이를 접목시키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래서 매주 1시간씩 정해진 시간을 활용해 제1회 공기 대회를 개최했다.



최고의 라이벌, 예선 첫 상대로 만나다


방식은 토너먼트로 하고 미리 대진표를 그려놓은 뒤 제비뽑기를 하여 판을 짰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에게 10점 내기를 걸어왔던, 결승까지 자신만만하다던 선호가 예선 첫 시합부터 예진이와 맞붙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선호의 떼부림이 시작되었다.


"선생님, 다시 뽑아요. 네?"

"선생님,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패자부활전을 열어달라는 선호. 두 손 두발 다 들고 계획에 없던 패자부활전을 열었다. 예선에서 탈락한 12명 중 2명이 본선 진출의 기회를 얻었고 거기에는 위풍당당 선호의 이름도 올라갔다.



준결승의 대반전? 예진이가 졌다!


아이들은 당연히 예진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든 시합의 심판을 자 다 볼 수는 없는데 아이들이 서로 응원하며 대신 심판을 봐주니 기특했다. 그런데 예진이와 시합을 하던 진수가 소리를 질렀다.


"선호야! 내가 예진이를 이겼어! 내가 너의 복수를 해 줄게!"


옆에서 보던 남자아이들은 좋아서 난리가 났고 여자 아이들은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30점 내기인데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한 여자 아이가 와서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점수 30점이면 30점 딱 맞춰야 해요?"


이게 무슨 소린가? 점수를 정한 건 그 점수를 넘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라고 다시 안내했다. 그랬더니 경기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했다. 30점에 딱 맞춰야 하기 때문에 30점을 넘겨버린 예진이에게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건 어느 나라의 공기 법칙인지. 아이들의 낯빛이 바뀌었다. 결국 예진이가 결승에 진출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원래는 결승에 진출한 3명에게 각각 모두 경기를 치르게 하고 금은동 순위를 결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약삭빠른 선호가 또 말했다.


"어차피 1등은 예진이니까 저희 둘이 2-3위전 하는 걸로 해요!"


그래서 한 시합을 덜 치르고 시간을 아꼈다. 그런데 2위라도 하겠다던 선호는 상진이와 맞붙어 15점 내기에서 지고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예선 떨어졌을 때보다 더 억울한 표정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 같았으나 자존심 강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얼른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30점 내기의 결승은 예상처럼 예진이의 승리로 끝났다.



아이들을 상대로 내기 시합을 신청하다


왠지 여기서 마무리 하기에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크게 나아지지 않아 친구들 시합에 시큰둥한 아이들도 마음에 걸렸다. 학기말 이벤트라도 열어주고픈 심정으로 내가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나랑 너희 23명이 대결을 하는 건 어때? 대신 기회는 단 한 번!"


그러니 또 두 번으로 늘려달라고 하는 아이들. 얘들아, 너희는 23명이잖아. 응?


"좋아, 그럼 나는 딱 한 번 할 테니까 너희는 모두 기회 두 번씩. 각자 1단부터 시작해서 점수 모두 더하기로 하자. 너희들이 이기면 쌤이 특별 간식 쏜다!"


와~~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 제발 나를 이겨서 간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묘한 승부욕으로 옛사람을 대표하여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너희 영어 수업 갔을 때 조금 묵직한 공기알 5개 따로 골라놨지.



과연 결과는?


책상을 다 밀고 다 같이 둥글게 앉았다. 아이들이 다 끝나고 나는 제일 마지막에 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막판 스퍼트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금은동 순위에 든 아이들을 마지막 순서에 배치했다. 드디어 경기 시작! 두 번의 기회가 무색하게 5단계까지도 못 가는 아이들이 10명이나 되었다. 1점이라도 좋으니 점수에 보태달라고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내가 속으로 빌고 있었다.


지난번 본선에서 예진이를 이길 뻔한 진수 차례. 체격은 우리 반에서 제일 크지만 야무진 손놀림이 매섭다. 드디어 손등에 있는 공기 다섯 알을 낚아채는 순간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렇게 쭉쭉 이어갔으면 좋았겠지만 진수가 얻은 점수는 9점. 그래도 값진 점수였다. 그리고 한동안 무득점에 아이들은 다급한 마음이 되었나 보다. 공기 대회 2위를 차지했던 상진이의 차례가 되었다.


"대회할 때보다 더 떨려."


귀여운 아이들. 나도 점수를 기다리느라 손에 땀이 났다. 그러나 예상외로 1점도 얻지 못했다. 너무 긴장했나? 다음 타자는 대회 1위였던 예진이 차례. 역시 명불허전의 실력. 그러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예진이도 살짝 긴장을 했는지 15점까지 선방했으나 레이스를 더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제 총점은 24점. 잘하고 있어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


다음은 공기 대회에 가장 큰 사활을 걸었던 마지막 주자 선호 차례. 손에 땀이 난다더니 정말 긴장을 했는지 3점에 그치고 말았다. 아이들의 총점은 27점으로 마무리.


이제 내 차례였다.


"어디 한번 시작해볼까?"


그때부터 아이들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괴성 지르기, 손 휘젓기, 바닥 때리기... 15점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레이스를 이어갔다. 괴성을 지르던 수인이가 옆에서 한 마디 한다.


"에이, 선생님 우리한테 간식 사는 돈이 그렇게 아까우세요?"


그건 아니었지만 나는 응답하라 1983 세대의 대표 주자이고 모교의 선배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봐주기는 싫었다. 20점까지는 다섯 알을 몽땅 잡아내던 나도 다섯 번째 5단계에서는 3점밖에 내지 못했다. 그리고 또 4점. 결국 27점 동점이었다. 아이들은 그래도 여기서 멈추어줬으면 하는 눈치였고 여전히 옆에서 고막이 터지도록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한 번 더 5단계에서 공기알 4개를 손 등에 올렸고... 그런데 그 순간 가까이에서 소리를 지르던 혜지가 내 손등을 탁 쳐서 올라가 있던 공기알이 바닥으로 떼구루루 떨어졌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그때 다른 아이가 말했다.


"야, 그래도 이건 아니다. 선생님 5단계 다시 하세요."


그래서 나는 다시 손등에 공기알 4개를 올렸다. 나도 이때는 실수할까 봐 살짝 떨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람을 가르는 속도로 날렵하게 공기알 네 개를 공중으로 띄운 뒤 더 빠른 속도로 한 알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낚아챘다. 31점! 결과는 나의 승리! 두 손을 모으고 좌우로 흔들며 세리머니를 했다. 내 편은 없는 게 조금은 서운했다.


아이들은 울상으로 투덜대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었구나. 설마 내가 이겼다고 간식을 취소하겠어? 벌써 수업 마칠 시간이라 아이들과 종례를 하며 이야기했다.


"간식은 원래대로 쏠게. 연습한다고 애썼고 수고 많았어. 그리고 너희들도 정말 잘했어."


그제야 웃어주는 아이들. 사실 학기만 업무는 자꾸만 미루고 싶고 놀고 싶은 마음인데 같이 놀아줘서 오히려 더 고마운 마음이니 간식은 당연히 사줄 수 있지! 다음날 금은동 아이들에게 선물 증정식을 끝으로 우리 반 제1회 공기 대회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한 가지 계획을 더 세우고 있다.



'얘들아, 우리 겨울방학 끝나고 만나서 제2회 공기 대회 열자. 그땐 너희한테 기회 세 번씩 줄게! 꼭 이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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