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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Dec 16. 2021

수능을 네 번이나 쳤다고요?

간절히 원하니 하게 되더라고요. 모든 수험생들 힘내세요!

학기 말이라 밀린 수행평가를 치는 중에 꼭 자기 것 먼저 다 했다고 시험지 뒤집어놓고 떠드는 녀석이 있었다. 곧 5학년 진급인데 벌써 몇 번째 잔소리인지 셀 수가 없지만 참 사람이 쉽게 안 변한다. 게다가 건너 건너에서는 맞장구치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받아주는 녀석도 있다. 이게 어디 시험장 분위기로 가당키나 한 것인가. 잔소리를 해도 말을 안 들으니 결국은 라떼는 말이야를 내뱉고야 말았다.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 시험 치면 이건 명백한 부정행위이다, 시험지를 빼앗길 지도, 0점을 받을지도 모른다, 수능을 칠 때 그렇다면 부정행위로 시험도 못 치고 퇴장을 당할 수도 있다... 이제 겨우 열한 살 아이들에게 얼마나 까마득한 이야기인지 알면서도 이런 잔소리만 늘어놓는 나는 정말 재미없는 담임이다.


잔소리가 이어지다 보니 수업 시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또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을까 싶어 다시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지금 한 이야기가 시험이랑 수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일까?" 저기 뒷자리에서 "네!"하고 대답이 들려온다. "정말 그런 뜻인 것 같아?" 하고 물으니 "아니요, 시험칠 때 태도를 말씀하신 거예요."라고 한 녀석이 대답한다. 잘 새겨 들었구나. 어차피 수업은 물 건너간 것 같고, 이참에 나의 수능 스토리를 풀어보자 싶었다. "자, 퀴즈~ 선생님이 수능을 몇 번 쳤을까?" 지난번에 얘기를 했던 것 같긴 한데 기억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저요! 두 번!" 했다가 아니라고 하니 세 번! 했다가 옆에서 다른 녀석이 네 번!을 외쳤다. 맞다고 하니 "수능을 네 번이나 쳤다고요?" 하며 놀라는 모습이 무척 귀엽다. 




교사라는 꿈은 중3 때 확실히 정했다. 확실히 이과 성향이고 수학을 무척 좋아했던 나는 국어, 사회에 쥐약이었는데 중2 때는 심지어 사회 시간에 엎드려 잠까지 잤다. 듣고자 하는 의지로 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듣지 않겠다는 의지로 엎드려 잠을 잔 것이다. 교사가 되고 보니 그때의 내가 어찌나 민망한지 생각할 때마다 뒤통수가 화끈하다. 그런데 솔직히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랬던 내가 1년 뒤 180도로 변하게 되는데 바로 중3 때 새로 오신 국사 선생님 덕분이었다. 역사신문이란 자료를 들고 오셔서는 설명을 얼마나 재미나고 맛깔나게 하시는지. 그분의 수업을 들으며 '나도 이 선생님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어!'라고 처음 생각했다. 역사는 정말 재미없다고만 생각했던 내게 수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재미있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 준 분이었다. 교사란 꿈을 정하고 나니 어떤 과목을 가르칠까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과목이 바로 수학이 아니던가. 내가 왜 수학을 좋아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내 꿈은 더 굳어졌다.


제법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여고에서 이과를 선택해 좋은 내신 성적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6개 반 중 두 반이 이과였는데 다 합쳐도 인원이 80명이 안되었으니 날고 기어 1등을 해도 내신 1%가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1등 할 실력도 안 되었다. 'K대 수학교육과 합격!' 하고 책상에 떡하니 써붙여 놓았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고3이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 재수는 절대 못 한다는 생각을 하니 목표를 낮춰서라도 꼭 한 방에 합격해야겠다는 부담이 많았다. 걸어서 40분이 걸리는 학교에 아침 자습을 위해 7시까지 등교를 하려니 차를 안 타고는 힘들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아빠가 운전해주시는 차를 매일 얻어 타고 다녔는데,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결국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서 친구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되어도 내가 안 와서 먼저 가버렸다고 했다. 너무 서러워 그날부터는 혼자 걸어서 다녔다. 그때의 나는 당장 잠을 잘 30분 보다 자존심이 더 중했나 보다.


2학기가 되니 교실 분위기는 더 살얼음판 같이 변했다. 제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짝을 맞춰 수학 과외를 시작한다고 했다. 과외 선생님은 직전에 의대에 합격한 1년 선배였다. 친구 듣기 불편할까 봐 부럽다는 말도 못 하고 그때부터 친구와 나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그리고 결전의 수능날, 언어 영역의 듣기 평가 2번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답이 뭐지?라고 생각한 순간 3번 문제가 시작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시험 시간 90분이 끝나 있었다. 시험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엉엉 목놓아 울었다. 엄마도 뉴스를 보고 이번 수능이 어렵다는 걸 들어 아시고는 그 후로는 크게 말씀이 없으셨다.


만점이 속출하여 물수능이라던 2001학년도 수능 후에 2002학년도 수능은 불수능이라고 했다. 10월 마지막 모의고사까지 겨우 끌어올린 점수가 3월 점수로 미끄러져버린 성적표를 받고 나니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나마 더 떨어지지 않은 걸 감사해야 했다. 원래 가고 싶었던 K대 농대라도 원서를 내보자는 담임 선생님과 의견 합의를 보지 못하고 고집을 부려 다른 국립 A대 수학교육과에 원서를 냈다. '나'군에는 국립 K공대 신소재공학과에, '다'군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원서를 안 냈던 것 같다. 나는 어떻게든 국립대에 가야 했다. 사범대에 떨어져도 공대에 가기는 싫었지만 혹시나 장학금을 받게 되면 다니고자 하는 심산으로 원서를 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사범대는 똑 떨어지고 공대는 장학금도 못 받게 되었다. 가기 싫은 학교에 100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며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2월 20일이 넘어 나는 엄마와 같이 K공대로 가서 등록 포기 각서를 내고 곧바로 동네 동사무소를 찾아가 공공근로 일자리 신청을 했다. 재수는 절대 안 된다는 엄마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 쓰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허락을 해주셨다. 다른 친구들이 캠퍼스에서 입학식을 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하게 되었다.




동사무소에서 한 일은 개발과 산업계 소속으로 보관해야 하는 공문서를 철하거나 농지원부 자료를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것과 같이 대부분 서류 작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원래 한글도 800타 정도를 치던 실력인데 이때 아르바이트를 계기로 은행원 못지않은 숫자 타자를 칠 수 있게 되었다. 또 야무진 손으로 시키는 대로 척척 파일을 만들어내니 담당 주사님께서 조금의 배려를 해 주셨다. 할 일을 대부분 마치면 더 이상의 일을 주지 않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운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주사님이 마침 고3 학부모였던 것이다. 캠퍼스를 누벼야 할 스무 살 아이가 돈을 벌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는 7월까지로 마무리를 지었다. 주사님 밑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이 자잘한 심부름이 내가 아닌 본인에게 돌아오자 상급 관리자에게 부당하다고 우리 상황을 일러바친 것이다.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던 것 같고 결혼은 하지 않은 남자 직원이었다. 참 세상 살기 녹녹지 않다 싶었다. 어차피 수능은 11월이고 공부에 더 전력을 쏟아야 할 때라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때 개발과 과장님께서 책 사는데 보태라고 하시며 손에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주시는데 눈물이 나는 걸 참느라 혼났다.


학원을 다니는 것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8, 9월 두 달간 대구 Y학원 단과반에서 국사와 한국지리 수업을 들었다. 그 후에는 오로지 EBS 강의만 듣고 공부했다. (나중에 EBS 선생님들이 메가스터디로 옮기셨다고 하면 참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다시 결전의 수능날이 왔다. 재수를 했다고 실력이 껑충 뛰는 기적은 없었다. 결과는 총 원점수가 겨우 15점만 올랐다는 것. 이번엔 어찌 되었든 대학에 가야 했다. K대 수학교육과는 얼토당토않고 수학과도 못 낼 점수라 고민 중에 통계학과도 수학으로 교직 이수를 시켜준다는 말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통계 학도가 되었다. 드디어 나도 3월 캠퍼스의 낭만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입학해보니 통계학과에서는 수학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주로 배웠다. 도대체 아무리 애를 써도 c언어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대학 수학 공부도 너무 어려웠다. 동기 45명 중에 10%만 교직이수의 기회를 얻는데 4.5명은 안 되니까 딱 4명에게만 오는 그 기회를 잡기란 애초에 힘들겠다 싶어 기대를 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같은 한 학번 위 선배들의 선배 노릇이 그때는 어찌나 자존심이 상한지 학과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덕분에 종교 동아리에 가입해 더 많이 활동하게 되었는데, 1학년 겨울 방학 때 갔던 수련회에서 중3 때 국사 선생님을 만났을 때와 같은 결정적 만남을 하게 된다. 바로 영화 'October sky'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탄광촌 마을의 소년들이 한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우주에 대한 꿈을 꾸고 로켓을 만들다 실제로 나사(NASA)에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저기도 멋진 선생님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꿈틀댔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학교를 졸업해도 괜찮을까 싶었다. 과 선배들은 제일 잘 들어가면 통계청이고 대부분 은행에 취직하거나 학원에서 수학 강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니 KBO에 들어가서 통계 관련 일을 해볼까 농담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지냈지만 결국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냈다. 6월에 교생실습을 가는 사범대 선배들을 보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결심이 굳어진 것이다.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로 부쳤다.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문과는 과학을, 이과는 사회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도록 수능이 바뀌어 있었다. 고3이었던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동생 친구들에게 교과서를 얻어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에는 학교 가는 것처럼 나가서는 도서관으로 향했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서는 문을 닫고 수능 연습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혹시나 내가 도서관에서 수능 공부를 한다고 소문이 나서 엄마 귀에 들어갈까 싶어 그때부터는 무려 기차를 타고 다니던 대학 근처에 있는 도서관까지 다니기 시작했다. 그만큼 처절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꼭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세 번째 수능. 도시락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능을 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수학도 1개 빼고는 검산까지 하며 완벽하게 풀었고 사회 문제도 모르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 (중등 임용 시험이 쉽지 않다는 걸 염두해 교대로 진로를 바꾸어 과학이 아닌 사회 과목을 선택했다. 교대를 가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도 있고 등록금도 국립 사범대보다 더 저렴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가채점을 했는데 수학에 마지막 찍은 문제까지 맞아서 만점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인가?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수학 원점수는 100점인데 외국어 영역 원점수가 67점이었다. 그래도 나머지 과목들 모두 등급이 높아 기대를 하고 붙을 거라는 기대로 엄마한테 조심스럽게 비밀을 밝혔다. 엄마는 배신감에 노발대발하셨지만 붙을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래도 꼬리를 내리고 지켜봐 주었다. 그런데 교대 두 군데에 원서를 냈지만 한 군데는 터무니없는 등수로 떨어지고 나머지 한 군데는 예비후보 8번이었는데 바로 앞에서 끊어졌다. 세 번째 수능도 실패였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 걸. 이런 제멋대로인 딸이어서 너무 죄송하고 계속 실망을 드려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복학원을 내지 않아 제적되었다는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할까? 선택해야만 했다.




기도를 했다. 이게 나의 욕심인지 당신이 정한 길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알고 싶었다. 교사라는 길이 내 길이 맞는지 알고 싶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 그런데 도무지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재수는 절대 안 된다던 내가 삼수를 하고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정말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은인이 나타났다. 엄마가 다니는 회사에 친구의 엄마가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재수를 해서 교대에 합격해 먼저 1년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줌마는 지금 1~2년 정도 늦는 건 괜찮다고 우리 엄마를 설득해주셨다. 나도 기도 응답을 받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결심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4수생의 길로 들어갔다.


전에도 계속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니고 수능 준비를 했었는데 그땐 용돈 때문에 내 공부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과외를 하면서 내 실력도 많이 좋아졌다는 확신이 들면서 오히려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교사라는 꿈을 내려놓겠다 결심했지만 종교적 신념으로 붙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몰래 하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분명 더 잘되었던 것도 있다. 그렇게 네 번째 수능을 치게 되었다. 한쪽으로 점수가 치우쳤던 세 번째 수능을 만회하는 고루고루 다 잘 본 점수가 나왔다. 그리고 눈치 싸움을 못해 약간은 억울했던 세 번째 수능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이번에는 끝까지 경쟁률을 확인하고 마지막 날 마감 직전에 원서를 냈다. 결과는 예비 번호 없는 합격. 2002년에 재수생 신분으로 월드컵 응원을 하며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참 많이 적고 되뇌곤 했는데 4년 만에 드디어 교사가 되기 위한 문턱을 간신히 넘으며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과외를 했던 학생들의 부모님들께서도 정말 많이 축하해주셨고, 특히 교회에 전도사님은 내가 4수 끝에 교대에 합격한 건 인간 승리라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건 정말 축복이라는 덕담까지 해 주셨다. 나는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야기를 듣고 난 반 아이 하나가 "우와, 선생님 진짜 대단하네요!" 하며 엄지척을 날려준다. (이렇게 길게 하지는 않고 짧게 줄여 5분 정도로 이야기했다.)


"너네 나중에 고3 되면 너무 힘들어서 그때 우리 선생님 수능 네 번이나 치고 정말 대단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 걸?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은 시간이거든."


사연 없는 수능 스토리가 어디 있을까만은 생색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꼭 그렇게 보일 것 같았다. 나는 대학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교사가 되려니 꼭 대학에 가야 해서 간 것이라고, 정말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느새 대학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강조했다. 공부가 전부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간절히 원하면 하게 되더라고, 그러니 아직 꿈이 없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야,라고.


시험칠 때 다른 친구들 방해되는 행동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려던 것이 이렇게나 길어져버렸다. 수능 스토리를 듣던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지만 또 금세 밝아졌다. 수업을 한 시간 쨌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 학생 때는 수업 빼고 다 재밌지. 나도 알아. 그래도 우린 더 중요한 인생 공부를 한 거야. 알았지?


(그리고 교대에 입학해서 다시 임용 3수를 하게 된 이야기는 다음에 꼭 써보고 싶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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