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기차는 놓쳤지만

결코 놓치지 않은 한 가지

by 초록빛보라

"엄마, 기차가 왜 멈췄어요?"


정차역이 아닌데 잘 가던 기차가 멈칫할 때 나는 살짝 직감했던 것 같다. 갈아타는 KTX를 탈 수가 없겠구나 하고. 지금 생각하면 5분 만에 꼬마 아이 둘을 데리고 플랫폼을 바꾸어 환승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예매를 할 때의 내 마음은 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교통수단에 대한 책을 읽다가 문득 기차를 태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이들이 우와! 하고 소리칠 때가 제일 좋으니까. 분명 아이들은 너무너무 궁금해했던 기차를 타면 우와! 하고 소리칠 것이 분명하니까. 육아가 힘든 건 사실이지만 행복이 더 큰 것도 맞다. 특히 아이들이 처음으로 뭔가를 경험할 때 그걸 지켜보는 것은 엄마로서의 가장 큰 행복함이다. 경기도에 사는 친구에게 하룻밤 잘 수 있겠냐고 묻기도 전에 이미 내 눈앞에는 기차를 타고 좋아서 폴짝거릴 아이들 모습이 보이고 내 머릿속에는 여행 시나리오가 촤르륵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방학 계획을 너무 늦게 짜는 바람에 기차 예매를 뒤늦게 알아봤더니 가야 하는 시간에는 자리가 없었다. 1시간이 넘게 입석으로 서서 가는 것은 불가능해서 생각한 것이 환승이었다. 구미에서 대전까지는 ITX를 타고 대전에서 다른 KTX로 갈아타면 시간은 조금 길어지더라도 앉아서 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고맙게도 친구가 정해진 시간에 광명역으로 차를 가지고 데리러 나와주기로 해서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씩씩하게 표를 예매했고, 다음날 남편이 차에 여행할 나머지 짐을 모두 싣고 서울까지 올라오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운 여행 계획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기차 안에 있는 잡지를 꺼내 보기도 하며 긴 시간을 제법 잘 버텨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벗게 하고 싶지는 않아 간식은 절대 먹지 않기로 한 약속도 잘 지켰다. 런데 문제는 잘 가던 기차가 갑자기 제동 장치 이상으로 잠시 3분 정도 정차를 한 것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5분 만에 환승을 하려면 늦어진 3분은 치명적이었다. 5분도 애초에 불가능한 시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때의 동동거림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 일인지 그땐 미처 몰랐다. 정말 정직하게도 정차한 3분만큼 정확히 늦게 대전에 도착했다. 게다가 승객이 엄청나게 많은 환승 센터라는 걸 왜 미처 생각을 못했는지, 줄줄이 내리는 승객들 틈에 끼여 뒤늦게 내려 저쪽 레인을 바라보니 이미 우리가 타야 하는 KTX는 다시 출발하려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에게 읽어 준 책의 문장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출발해요. 먼저 원하는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사고, 출발 시간 전에 기차역에 도착해야 해요.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를 타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해요.
그레이트북스 사회 공룡 시리즈 중 <타고, 타고, 타고!> 책의 일부




"어떡해... 우리가 늦게 도착해서 KTX가 가버렸어."

"그래? 어떡해...."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기엔 계획이 부실하긴 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놓치고 나니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약간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모험심이 발동했다. 창구로 가서 못 탄 기차표를 반환하는 건 얼른 했는데 문제는 뒤에 있는 기차들이 전부 매진이어서 아예 광명까지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30분이 넘게 승차권 예매 페이지의 새로고침만 주구장창 눌러댔다. 주말에는 취소표들이 나오기 때문에 분명 자리가 날 거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빨리 기차 타러 가자고 다른 기차는 왜 못 타냐고 속 물어왔지만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는 이미 놓쳐버렸고 다른 기차도 자리가 있어야 탈 수 있다고 차분히 설명했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고속버스를 타도 족히 3시간은 걸릴 것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자리가 제법 많았기에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염두에 두고 계속 광명행 KTX의 자리를 눈에 불을 켜고 검색했다. 그런데 앉아서 버틴 지 1시간이 조금 안되었을 때 드디어 친구가 특실 예매에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할렐루야! 역시 집으로 돌아오긴 싫었던 내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너무나 감사했다. 오래된 내 폰은 배터리가 점점 꺼져가고 있었는데 드디어 마음 놓고 출발 시간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2층 푸드 코너를 돌다가 한 카페에 테이블 하나가 빈 걸 확인하고는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앉혔다. 휴대폰 충전을 부탁드리고 커피와 도넛, 아이들 주스를 사서 50분 정도를 어떻게 잘 버텼다.




비록 기차는 놓쳤지만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기에 이제는 즐거운 에피소드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수시로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철이 덜 든 부모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과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멋진 부모로 보일 수도 있다. 주로 어른들께는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남편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어디에 나서기가 힘든 엄마들에게는 후자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걸 엄마가 자주 경험시켜주어서 좋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신체력을 동원하여 움직여야 하니 목적은 순수하지만 몸이 고되기도 할 것이다.

비록 기차는 놓쳤지만 이번 경험으로 다시 한번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기에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고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늘 가던 식당에서도 꼭 새로운 메뉴를 시켜 먹어보고,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가는 것도 참 좋아한다. 육아를 하며 내 시간이 많이 줄어들어 힘들긴 하지만, 또 그만큼 주어진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채우는 것이 또 다른 기쁨이다. 하고재비가 어디 가겠나.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준비해 볼까. 그리고 기차를 놓치고 오래도록 기다려 다른 기차를 탔던 이번 경험을 나중에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같이 놀러 가자 하면 엄마 아빠만 가라고 하는 때가 온다고 하니 그전에 부지런히 좋은 추억 차곡차곡 많이 담아야지.


도착 예정 시각보다 2시간이나 늦었지만, 그래도 좋아해 줘서 고마워


덧. 수능을 네 번이나 치고 교대에 합격했을 때 부럽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너도 수능 다시 쳐 봐."였다. 정말 진심으로. 나는 실패하더라도 도전해보고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렇게 다니다 보면 "대단하다." 또는 "추진력이 부럽다."는 말들을 많이 듣곤 하는데 그럴 때 하고 싶은 말도 마찬가지다. "한 번 해보세요. 괜찮아요. 큰 일 안 나요." 나는야 무모한 도전 전도사!

매거진의 이전글어린이집 방학 첫날 등원시키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