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봉쇄된 도시에 야생동물이 등장하다
야생을 새로 발견한 것만 같은 요즘이다.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퓨마가, 콜롬비아에서는 여우가, 그리고 지구 어딘가 도심에 계속 원숭이, 늑대, 칠면조가 나타났다. 소셜 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공유되는 사진들 속에서 숨어 있던 야생을 확인하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인간의 일상이 멈춘 도심을 의연히 어슬렁거리는 포유류 무리는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이질감을 풍긴다.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한 장면, 폐허가 된 빌딩 숲속 콘크리트 틈 사이로 정돈되지 않은 풀들이 자라고, 그 사이사이 사자와 사슴이 배를 깔고 자리 잡은 기묘한 풍경이 오버랩된다.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과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 동일한 시공간에 놓인 어색한 풍경에서 우리는 어쩌면 내가 점유하고 있던 도시가 원래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지도 모른다. 인적 드문 아스팔트 바닥을 걸으며 야생은 인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어.
하지만 이런 현상을 낭만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내가 환경운동가이기 때문일까? 언제나 거기 있었으나 있지 않았던 ‘야생’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접촉, 경계, 공존
야생동물이지만 동물원에 갇혀 있는 곰이 있다. 야생동물이지만 웅담 채취를 위해 철창 속에서 10년을 살다 도축당하는 일명 ‘사육곰’이 있다. 야생동물의 개체수 복원을 위해 인위적으로 자연에 방사한 곰이 있다. 그리고 야생에서 자유롭게 사는 곰이 있다. 이 각기 다른 상황에 처했으나 전부 ‘야생동물’이라고 불리는 곰들의 다른 처지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에게 착취당하고 생명을 잃으면서 동시에 또 인간에게 구출되고 보호받는 그들 존재의 아이러니. ‘우리가 도대체 야생을 어떻게 대해왔을까.’라는 진부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야생과 인간 생활 사이의 흐려진 경계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쥐의 서식지는 우리 인간의 난개발로 그 경계가 무너졌다. 삼림 벌목으로 삶터를 잃은 박쥐가 돼지 농가까지 날아들고, 박쥐 똥을 먹은 돼지를 인간이 취하는 과정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인간을 위협하게 되었다. 코로나뿐 아니라 사스와 메르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도대체 야생의 무엇을 건드린 걸까?
인간의 길이 야생동물의 길은 아니다. 도로가에 자리한 투명한 방음벽. 커다란 칼로 썰어내듯 숲은 토막 나고, 그 자리에 깔린 아스팔트 길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새들은 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비행한다. 숲의 자리에 놓인 도로, 이 경계를 뚜렷이 구분 짓는 투명한 방음벽은 사람에게만 잘 보이는 벽이다. 새의 시선으로는 투명한 창이 벽임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약 800만 마리의 새가 이 벽에 부딪혀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만 마리의 새가 인간이 만든 투명한 벽에 충돌해 죽어간다. 하늘 로드킬이다. 띄엄띄엄 붙어 있는 맹금류 스티커는 전혀 효과가 없다. 맹금류의 그림자를 보면 새들이 ‘아이코, 천적이다. 무서워!’ 하며 피할 거라는 생각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다. 촘촘하게 찍힌 무늬만이 새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비로소 ‘통과할 수 없는 벽’으로 인식된다. 인간에게 ‘야생과의 공존’이라는 개념은 턱없이 미미하다. 자외선을 인지할 수 있는 새들을 위해 유리창을 만들 때 자외선을 반사하도록 처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산의 한 지방도로 방음벽 아래 죽어 있던 물총새를 보며 생각했다.
뉴 노멀: 공존을 위한 생태적 시선이 필요하다
시인 이문재는 ‘세면대와 화장실에서 바다를 떠올릴 수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기는 바다의 입’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일, 그게 환경운동가인 내가 하는 일일 것이다. 가려졌던 풍경의 막을 활짝 젖혀 드러내고, 꺼내놓고, 떠들어대는 것. 변두리로 밀쳐진 존재들에 조명을 비추고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잡아당기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느끼자. 철창 너머, 콘크리트 벽 너머의 생명을 상상하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이면에 있는 복잡한 그물망을 떠올리자. 팬데믹이 종식되고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아도, 야생동물이 있던 자리 위에 인간의 삶터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일상에서 야생을 떠올리는 일은 새를, 박쥐를, 곰을 위한 일이자 결국 우리를 위한 일이 될 테니까.
*빅이슈 231호(2020.6.15.발행)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