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의 음식 향기

- 외할머니의 닭칼국수와 친할머니의 추어탕

by 이지현

기억의 향기



사람의 향기는 때로 음식의 향기다.

프루스트가 마들렌느의 향기를 기억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의 여로를 더듬어 가듯, 냄새야말로 누군가를 생각하는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내게는 두 가지의 음식 냄새가 기억의 한편에 진을 치고 있다. 그 혀끝에 감돌던 맛과 음식 향내와 할머니들에 대한 기억.

외할머니의 칼국수와 친할머니의 추어탕.



외할머니가 밀대로 밀면서 가늘게 뽑아내던 칼국수와 안개처럼 자욱하던 밀가루의 분향. 그냥 넋을 놓고 그 뽀얀 밀가루의 연무를 바라보았고, 한편에서는 밀가루보다 더 뽀얀 국물이 들끓고 있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국수를 좋아하던 나를 위해 칼국수를 직접 밀대로 밀어서 칼로 썩썩 썰어 푹푹 끓고 있던 국물 속으로 뚝뚝 잘라 담그셨다.


국수가 다 익고, 닭 살코기를 손으로 쭉쭉 찢어서 칼국수 위에 고명으로 얹을 때쯤이야, 닭 한 마리가 나를 위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 황홀한 맛에 반해서 어디로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솥에서 설설 끓이며 떠먹던 그 칼국수의 맛이야말로 감히 어디에 비하겠는가.

그 이후 워낙 국수를 좋아해서 칼국수란 이름이 들어있는 국수들을 볼 때마다 섭렵했지만 할머니의 칼국수를 능가할 어떤 맛도 발견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칼로 총총 썰어 국수를 만들었지만, 내가 먹는 칼국수는 아린 쇠 맛의 기계 맛이 배었기 때문일까?




님의 침묵 위에 놓인 추어탕



두 번째로 기억나는 친할머니의 음식은 추어탕이다.

중학교 2학년, 여중을 가려면 집에서 좀 멀고, 그보다는 집을 떠나 있고 싶을 때의 나이였던 탓에 시내 한복판인 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할머니 집의 대청은 얼마나 매일매일 닦는지, 나무가 반질거려서 서정주의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처럼 오랜 외로움과 쓸쓸함이 절로 묻어있던 곳이고, 나는 곧잘 그 대청에 엎드려 당시 여고생이던 사촌 희야 언니의 국어책에 실린 시들을 노트에 열심히 베끼는 걸 좋아했다.

그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얼마나 여러 번 베꼈는지 대청에 드러누워, '아아,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고 중얼거리며 목이 턱 메곤 했다. 깊은 뜻도 모른 채.

오랜 우물곁에는, 반짝이는 간장 항아리와 된장독들이 놓여있었고, 접근금지였던 아련한 냄새를 가진 광에 몰래 들어가면 거미줄 친 어두운 광은 쌀가마들과 농기구들로 퀴퀴한 냄새가 분진처럼 서려있었다.

두려워 얼른 돌아와 대청에 누워서 다시, '아아, 님은 갔습니다', 하면서 바라보면, 할머니가 상으로만 주려고 감춰둔 과자들이 있는 광주리가 시렁 위에 덩그러니 보이던 집이었다.


그날은 왁자하니 친구들을 끌고 할머니 집에 왔다.

대청 위에 차려진 둥근 상에 다들 둘러앉은 인원이니 대여섯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한참 떠들고 웃을 나이와, 한참 배고플 나이의 우리는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상을 한 상 받았으니 그 기적 같은 놀라움만 해도 까무러칠 일인데, 게다가 처음 맛보는 탕은 아직도 가슴이 다 떨릴 정도다.


할머니는 이름이 추어탕이라고 가르쳐주셨고, 집 앞 개천에 바글거리던 그 미꾸라지가 식재료라고 했으니 펄쩍 뒤로 넘어가던 놀라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진흙 속을 뒤적이면 바로바로 몸서리치면서 달아나던 미꾸라지에게 미안해할 겨를도 없이, 한참 먹는데 굶주린 우리는 각기 적어도 두 그릇씩은 뚝딱 해치우고 말았다. 나는 물론 세 그릇을 먹은 걸 잊지 않지만.


그날의 대청에서는 다들 치마의 훅을 열고, 먹으면서 연신 아, 맛있다를 연발하던 포만과 추어탕 속 산초 향이 감돌았다. 처음 맡아본 향내는 이후에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음식의 한 가지로 추어탕을 추가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엄마는 음식 솜씨는커녕 부엌도 싫어해서 뜻밖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지만, 다행히도 내 주변은 음식 솜씨가 넘치는 사람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대물림 되던 음식 향기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이후에 큰고모에게 대물림되어 의사의 부인이면서도 음식을 만들기만 하면 다들 넋을 놓을 정도로 솜씨가 자자했다. 혼례날이면 고모는 어김없이 인근이든 멀리든 불려 가고, 고모의 이바지 음식이 들어가야 그 결혼식이 정말 결혼식 다웠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정식으로 배운 요리도 아니었다. 그냥 대물림이지 않았을까 한다.


할머니는 안동 장씨셨다. 그 <음식 디미방>을 지은 안동 장씨의 후손쯤 되는 DNA를 물려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모가 탁월한 음식 솜씨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할아버지가 재령 이씨였으니 아마 그 고을의 집성촌 어디쯤에서 만나서 고모같은 분을 태어나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내 멋대로 하곤 했다.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고모의 음식 맛을 다신 맛볼 수 없다는데 더 절망했다.

고모집의 항아리들을 열면 방게장을 위시해서 온갖 장아찌들이 그득했고, 각종 장들이 가지런했다. 유과니 정과는 늘 고아져 있었다. 천도 복숭아 하나를 마련해도 쩍쩍 갈라져 꿀물보다 더 달디단 즙이 절로 흘러나오는, 음식이라면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선구안을 가졌었다.


다시는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그 진기한 음식들을 기억하면 마음이 저리다. 고모의 음식들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아까운 기억도 있다는 것을 늘 깨닫는다.



음식 만들기를 즐기는 나는 가끔 요리랍시고 내면서 늘 할머니들의 칼국수와 추어탕을 비교하면서 누가 어떤 음식으로 날 기억할까 궁금해한다.


한때 할머니의 추어탕을 재현해보려고 했던 적이 있다. 고모의 음식 맛을 따라 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서 언감생심 꿈조차 꾸어본 적은 없지만. 할머니들의 구수한 음식이나 닮아 볼까 했지만 할머니들의 맛도 똑같이 해본 적이 없다.


할머니들의 그 아득하고 감칠맛 나는 요리를 떠올릴 때면 그저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접시에 이쁘고 현란하게 담아내 보는 것으로 위로하며 눙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 책들 속에서나 추억과 그리움의 음식 향기를 맡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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