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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Jan 27. 2023

바닷가 따스한 카페의 풍경

- <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어렸을 때 쌍무지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늘 기대하지만 무지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처럼 도시의 숲에서 살 때는. 게다가 쌍무지개라니. 하나만 걸려있어도 좋은 곳에 꿈같은 어여쁜 무지개다리 하나가 더 걸려있는 것을 본 것은 두고두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내 삶은 그 무지개처럼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쭉 담임을 맡으셨던 최숙희 선생님은 쌍무지개를 보면 소원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한두 번 정도 본 쌍무지개에 잽싸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빌었던지 모르지만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은 모두 쌍무지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리고 잘 안된 것은 무엇이 안 될지 몰라서 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터무니없지만 종종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철없던 우리들에게 <쌍무지개 뜨는 언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 무지개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하나의 삶으로 들어와 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무지개와 소원의 관계 정립이 잘 이루어졌던지 모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훌쩍거렸지만 그래도 가슴에 저마다 쌍무지개의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무지개는 꿈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과 그에 어울리는 노래로 이루어진 글의 내용은 계절마다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가의 고향인 치바현에 실재하는 카페인 ‘무지개 케이프 다방’을 소재로 쓴 이 책을 읽을 줄 알았더라면 에도강 건너의 치바현을 가보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동경 생활의 뼈저린 고독을 달래기 위해 에도강으로 종종 나갔고, 에도강에 걸쳐진 그 다리만 건너가면 치바현이었지만 낯가림이 심한 나는 결국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였던 에스코는 화가 남편이 무지개 그림을 남기고 죽은 뒤 그림의 배경인 곶으로 들어왔고, 두 개의 테이블이 전부인 작고 아담한 카페에서 손님만을 위한 커피와 선곡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림 속 무지개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찻집을 운영합니다.


봄에 찾아온 도예가, 오사와 가스히코는 아내 사에코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죽자, 딸 노조미와 무지개를 찾으러 갔다가 이 찻집을 발견합니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여덟 색깔 무지개 그림이 바로 이 찻집에 걸려있었고, 에스코는 이 부녀가 찾아오자 놀라운 은혜라는 뜻의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려줍니다.


작은 출판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잔뜩 모욕만 당한 이마겐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섰다가 기름이 떨어지고 화장실이 급한 곤경에 처했을 때 카페 ‘곶’의 이정표를 보고 찾아듭니다. 카페서 놀라울 정도의 맛있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곶 카페의 벽에 걸린 그림을 그린 여자와 사랑하게 된 이마겐은 여름의 바다에서 감성돔을 낚습니다.


감성돔은 양식이 안 된다고 들었던 듯한데, 여느 돔과는 달리 몸에 줄무늬를 가진 감성돔은 회가 아주 달콤합니다.

좌절의 연속인 일상을 살아오던 이마겐에게 에스코가 틀어준 비치 보이스의 노래 ‘걸즈 온 더 비치’와 함께 다가온 여름은 이제 이마겐에게 멋진 계절이 되었습니다.


허술한 나무창을 뜯어내고 칼을 쥔 채 들어온 어리숙한 도둑은 갑자기 커피 끓이는 냄새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자 깜짝 놀랍니다. 칼갈이인 강도에게 에스코는 숫돌을 사 오라면서 돈을 주며, 새로 삶을 주려는 의미로 가스펠송 더 프레이어를 들려줍니다. 도나 멕클러킨과 욜란다 아담스가 듀엣으로 부르는 기도의 노래입니다.


간디의 말, 실수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는 말처럼, 에스코는 원래 칼 만드는 장인이었지만 싸구려 중국제가 들어오면서 직업을 잃고 손대는 사업마저 망하면서 도둑으로 전락한 가을의 손님에게 자신의 칼을 갈아달라고 부탁하고, 도둑 역시 자신이 직접 만든 칼을 슬쩍 두고 나옵니다.




겨울 편은 에쓰코와 그녀를 오래 흠모해 온 카페 단골이자 독신 남성 다니가 나옵니다. 에스코는 오랫동안 모르는 척하면서 우정을 유지해 옵니다.

에스코가 다니에게서 선물 받은 천체 망원경으로 도쿄 만에서 배로 떠나는 다니의 모습을 좇고, 노년의 사랑은 ‘러브 미 텐더’라는 곡에 실립니다.


다니가 떠나기 전 벵에돔을 손질하여 접시에 담고 머리와 꼬리로 장식해 줍니다. 그녀는 크래커 위에 크림치즈랑 햄 연어 알들을 올려 간단한 안주를 만들고, 유자 향이 나는 절임 음식이랑 낮에 만들어 맛이 적당히 밴 어묵탕도 꺼내옵니다.

마실 술은 고슈 와인으로 야마나시 현에서 나는 고슈라는 품종의 포도로 만들어지는 화이트 와인인데 신기하게도 일본 음식에 잘 맞고 입에 닿는 느낌도 산뜻하고 맛있다고 합니다. 겨울 벵에돔은 김을 많이 먹기 때문에 냄새도 안 나고 맛있다니 입맛이 다셔집니다.


다시 돌아온 봄과 여름 편의 주인공은 에쓰코 자신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조카 고지, 그리고 한 발을 절름거리는 늙은 개 고타로입니다. 각자 추억과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소박하고 담담하게 세월을 보내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굵은 붓으로 그린 수묵화 같습니다.

너무 담담하게 흘러 낡은 화판처럼 느껴지지만, 커피와 음악,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음악처럼 깔립니다.


 에스코가 차를 준비할 때마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하고 주문을 외우면 신비할 정도로 맛있어집니다. 따뜻한 찻집 주인의 마음이 커피 향에 전해져 손님들은 금세 얼었던 마음을 녹입니다.




지금 한국은 다음날 눈만 뜨고 나면 카페가 생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새로 생기는 건물엔 어김없이 카페가 먼저 들어섭니다. 카페는 풍경을 선점하고 이제는 오히려 풍경이 카페 때문에 변하고 있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더 비싸게 느껴지는 커피값. 점심을 먹은 후엔 한 손에 1회용 커피 컵을 들어야 어쩐지 폼 나고 여유 있어 보이는 풍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나는 촌스러워서 이런 비싼 커피를 마시지는 못 합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연말 교수모임에서 어느 호텔의 커피숍에서 앞서 먹은 안심스테이크는 한우 소고기라서 비싸다고 쳐도, 그 당시 쌀 한말보다 더 비싼 커피 한 잔에 기겁을 하고, 나는 정말 촌스럽게도 커피 한 잔을 놓고 망년 모임에 모인 그 점잖은 사람들 앞에서 쌀 한 말 값과 비교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경악스러웠던 것보다 더 나를 경악스럽게 보던 사람들. 그 이후로 나는 전문 커피점인 카페는 내 돈 내고는 절대 들어가지도 사 먹지도 못 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홀짝 마셔버리면 그만일 커피를 그렇게 비싼 값을 내고 혼자 무심히 먹을 수는 없다는 마음에, 그래서 고작 커피를 즐기는 방법이 로스팅한 커피 원두를 사다가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 먹는 일입니다. 그러면 커피 한 잔 값으로 적어도 한 달을 즐길 수 있습니다.


취업의 고비를 맞고 좌절하는 청년, 사업 실패로 아내와 아이는 떠나고 찻집을 털러 온 도둑, 젊은 시절 밴드를 했던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꿈꾸는 에쓰코의 조카, 에스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는 단골손님, 그들은 모두 찻집에 걸려 있는 무지개 그림에 반하고 맙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신의 미래에 꿈도 희망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타인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당신에게도 소중한 사람 한둘은 있겠지요? 그 사람들의 미래가 조금이라도 밝아지도록 기도하고 그를 위해 행동한다면, 그럭저럭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에스코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어떤 명언보다도 감동적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생각의 시간이라는 어떤 사람의 말이 어쩌면 맞습니다. 커피콩을 갈고 물을 붓고 커피가 내려지는 그 시간 동안 짧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의 카페 유리창 너머로 한가히 앉아있는 사람들의 여유가 가끔은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지개 곶에 있는 카페처럼, 멀리 바다를 보는 곳이 있다면, 오가는 사람들이 빈번하지 않아도, 한 번쯤 찾아가서 앉아있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커피값이 아무리 비싸도 풍경 값으로 칠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들이 올 때면 외면하지 말고 에스코처럼 맛있는 커피 한 잔과, 멋진 음악을 들려줄 수 있으면 삶이 족합니다. 멋진 풍경은 없는 곳이어도, 조곤조곤한 말은 나누지 않아도 그저 김이 나는 따스한 커피 한 잔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대접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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