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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y 14. 2021

눈부신 5월이면 떠오르는, 삶에 힘이 된 스승들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고 물살보다도 급해서 생각할 틈도 여유도 주지 않는다. 그 급류에 휩쓸려 가느라고 지나간 것들, 추억인 것들은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흔적조차 남기 어렵다.

래서 기념일이라면 적어도 그날과 관련된 사람들을 각하니 좋다.


스승의 날, 이 날만이라도 선생님들을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스승의 날이면 나도 숱한 선생님들 사이에서 꼭 네 분의 선생님을 잊지 않고 기억해 본다.



최*희 선생님



아직도 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 날이 생생하다. 3월이 시작되던,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운동장에서 지루하게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 아래 학교여서 온 바람이 다 운동장으로만 와, 하고 몰려드는지 그렇게 추웠다. 그래도 어린 우리들은 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통나무가 그때의 우리들의 자세 같았을까.

이제 콧물을 겨우 뗀 우리들은 가슴에 단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면서 추운 바람에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이다가 손수건에 닦다가 하면서 나오지 않는 선생님을 기다렸다. 다른 반들은 담임선생님이 나타나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우리 반만 오래 기다렸다.


다른 선생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교단 아래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때는 우리도 몸을 비비 꼬며 더 이상 서있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린 우리나, 기다리고 선 엄마들이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선생님이 나오실 교무실 쪽만 눈알이 아프도록 보고 있었다. 불평은커녕 우리 선생님이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것인지, 얼굴도 보지 못한 선생님이지만 무슨 일이 생기신 건지. 그게 더 궁금했다.  


드디어 하이힐을 만지며 나타나신 선생님은 그 후 3학년 때까지 담임이 되었다.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는 선생님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담임을 맡아, 여러 가지 일들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후에 들었지만, 아무도 선생님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은 별로 웃는 법이 없었다. 처음 운동장에 나타나신 날도 그랬다. 선생님은 어머님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결혼을 미루셨던 노처녀 선생님이셨고 그 덕분인지 오로지 우리들에게만 온 신경을 쏟으셨다. 3년 동안 담임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부반장이었던 적도 있어서 가정방문에 따라다니곤 했다. 나같이 말도 안 하던 아이가 부반장을 했던 것을 보면 아마 돌아가면서 임원을 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는 다들 너무 힘들게 살 때여서 어린 자식들을 일하는 곳으로 내보내곤 했으니 학교는 당연히 결석하는 애들이 많았다. 선생님은 학교를 나오지 않는 아이의 집에 가정방문을 가서, 학교에 다니도록 부모님들을 설득하러 다니셨다. 또 그 친구를 위해 우리에게 노트를 나눠주며 수업 못한 부분을 공책에 베끼게 해서 학교에 나올 때는 공부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그런 아이들을 찾아갈 때면 선생님은 남은 옥수수 급식 빵을 모두 싸가지고 갔다.

그때는 옥수수 냄새가 아주 진하고 향기로운 빵들이 급식으로 나왔다.

국민학교 수업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아침도 굶고 오는 애들이나, 집에 가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애들을 위해 선지, 거대한 바구니 안에 옥수수빵이 잔뜩 들어서 점심시간마다 교실로 왔다.


아침에는 옥수수 죽도 있었다. 풍구를 학교 운동장에서 돌려서 옥수수죽을 끓여 밥을 먹지 못하고 오는 애들이나 밥을 먹고 오더라도 침이 꿀꺽 넘어가게 맛있는 옥수수죽이 아침부터 골고루 돌아갔다. 나도 그 풍구를 돌리면서 그 달콤한 옥수수 향기를 얼마나 침을 삼키며 끓이고 있었던지, 그 죽이나 빵을 선생님은 꼭 챙기셔서 아이들의 손에 들려주거나,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애들의 집에 가지고 갔다.


훗날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40이 넘어서 교육청의 장학사 선생님과 결혼하셨다며 그날 찾아간 나에게 맛있는 점심을 지어주셨다. 선생님 집 마당에 조선 소나무가 한그루 푸르게 서있었다. 그 소나무의 푸름만큼 내 생애 많은 감동과 기억을 남긴 분이시다.




오*자 선생님



나를 좀 못 살게(?)군 선생님이셨다. 왜 나를 그렇게 괴롭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선생님의 기에 팍 눌려 고스란히 명령에 따랐다. 모두들 학교가 끝나고 적막 그 자체인 교실에 언제나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지금 생각해도 국민학교, 그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해보라. 무서움과 적막감으로 교실 창밖을 바라보면 언제나 어둠이 슬그머니 가라앉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이 많은 노처녀셨고, 담임인 최숙희 선생님과 제일 친했다. 결국 학교엔 선생님과 나만 남았다.


선생님이 내준 제목의 글을 낑낑거리며 쓰느라고 나름대로 애썼지만, 선생님의 마음에 들 때는 언제나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렇게 오래 선생님은 나를 학교에 남겨두고 글짓기를 가르치셨다. 특히 백일장이 다가올 때는 글짓기 훈련은 더욱 심각해졌다.


어느 백일장이 있던 날, 선생님은 나와 함께 논길, 밭길을 걸어 백일장이 열리는 학교까지 걸어갔다. 어린 나는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 달리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그 학교는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버스를 타면 바로 갈 수 있었고, 혹은 그냥 걸어서 가더라도 편한 아스팔트 길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굳이 빙 둘러서 논밭길을 걸어서 갔다.


그날의 백일장에서 어린 나이에 조개 까기와 제삿날에 대해서 적었으니, 선생님이 고쳐주었을 것이다, 아이가 적었다 아니다로 논란까지 갔다. 그러나 심사위원들 앞에서 다시 쓰면서 상을 타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도 그날은 논밭길로 또 걸어왔다.


백일장이 열리는 날, 선생님이 편한 길을 내버려 두고 논길 밭길을 걸어서 대회 장소까지 오고 간 이유는 훗날 생각하면, 두고두고 세상의 이치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던 선생님 나름대로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날 편한 길을 갔더라면 나는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어둠이 내리던 교실과 운동장, 복도를 걸어서 교무실의 선생님께 쓴 글을 보여주러 가던 무서움과 조마조마함, 그 고독한 긴 길을 떠올리면서 나는 인생이 그렇게 고독하고 고적하면서, 홀로 열심히 애쓰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배웠었다.   

그리고 지금 어느 선생님이 그렇게 자신의 귀한 시간을 나누어줄 수 있을지, 그런 선생님이 그립고 아쉽다.




이*선 교수님



3월 개나리가 한창인 교정이었다. 교수님과 딱 마주쳤다. 개강을 막 한 날이었다. 교수님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너 왜 나한테 신춘문예 낸다고 말을 안했냐. 진작에 말했어야지"


그런데 나도 까맣게 잊었던 일이었다.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문학을 전공하는 주변인들은 신춘문예로 설렜고, 나도 그 여파에 처음으로 투고했다. 그러나 문학비평이었으니 처음은 차하고라도 언감생심 꿈조차 꾸지 않았으니 1월의 신문조차도 들추어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니, 교수님이 최종심 심사위원이었고, 최종심에 올라온 2편의 비평이 내 글과, 같이 심사를 하던 다른 교수님의 제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최종심 심사를 하기 전에 이미 그 교수님과 최종심에 그분의 제자 것이 올라오면 뽑아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뜻밖에 내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는 아차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자는 박사과정 마지막 졸업을 앞둔 상황이라서 번복하기도 참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내가 이상에 관해 썼던 과제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 글을 더 확장하여 이상의 시와 소설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관통하여서 해석한 것을 투고했었다.

최종심에 내 글이 올라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면 절대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리 투고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고 계속 아쉬워하셨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내 비평이 훨씬 잘 쓴 것이었지만, 미리 약속된 것이어서 번복이 힘들었다고 하시며, 다음 해는 내 비평으로 꼭 뽑자고 그 교수님과 약속했으니 반드시 다시 내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비로소 그날 도서관에 가서 부랴 사랴 신문을 찾아서 내가 문학비평으로 최종심 2편 중에 선정된 것을 확인했다.


첫 문학비평 투고에 최종심 2편까지 올라간 것만 해도 나로서는 솔직히 만족이었다. 내가 보아도 휩쓸려서 급하게 낸 것이라서 문장은 거칠고, 이미지 비평의 흉내만 낸 것이었다.

그러나 글 선정의 한 실상을 알게 되어 그 당시는 20대의 젊은 오기와 치기로 다신 신춘문예 같은 데는 글을 넣지 않겠다고 다짐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다짐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나는 근 10년 가까이 문학 강의를 쫓아다니면서 하게 되었다. 나로선 그것만도 충분했다. 사는 게 바빠서 너무 오랫동안 글 쓰는 것을 잊었고, 공부의 끈도 놓아버렸다. 기회가 오더라도 번번이 아웃사이더에서 지냈지만,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던 것도 교수님의 그 단 한마디, '잘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것을 교수님도 알고 나는 더 잘 안다. 그래도 누군가를 격려하는 힘은 센 것이다.

윤여정 배우도 74세에 금자탑을 쌓았으니, 나는 아직 10년은 더 남았으니 그냥 글 쓰는 끈이나 놓지 않으려고 다짐해 본다.



하나와 선생님



안식년이 있던 해 미국과 일본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아이가 셋이나 되고 갓난아이도 있어서 가까운 동경으로 떠났다. 큰 애는 동경의 소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일본말은 아예 몰랐다. 담임인 하나와 선생님은 하교시간 후에 아이를 학교에 남겨서 일본 글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20일째 되는 날, 전화를 주셨다.  


"아이가 책을 읽고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떤 일본어로 발표와 공부도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알아서 잘할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 후로 큰애는 일본 학교생활을 힘들이지 않고 했다.

2학년 전체서 한국서 온 애가 늘 1등을 했고, 선생님은 차별 없이 동경 전체 소학교 사생대회도 아이를 참가시켜서 대상을 받아 요미우리 신문과 동경신문에까지 기사화되었고, 한국 소녀가 대상을 탔으니 학부형으로서 그런 유명 신문들과 인터뷰도 했다. 그야말로 선생님의 은혜가 백골난망이다.

아이가 소학교까지 가는 길도 몰라, 익숙해질 때까지 처음 등교 날부터 동네 아이들과 조를 짜서 등하교를 도와주었으니 나는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오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일본에 도착해서 살림살이 장만도 미처 못 했을 때, 같은 반 학부형들을 다 모아서 부엌에서 쓸 그릇들을 일체 챙겨 와서 일본에 있을 동안 그릇 하나 사지 않고 지냈다.

일본 장보기도 미숙한 나를 대신해서 아이가 필요한 일체의 문구까지 하나와 선생님이 장만해주어 내내 안심하고 학교를 다니게 했다.

여자아이들의 날인 히나마쓰리에는 선생님의 집에 데려가 일본 문화까지 보고 느끼게 해 주고, 일본에서 떠나올 때는 양딸로 삼아서 동경대학교까지 자신이 책임지고 가르쳐서 보낼 테니 아이를 남겨두고 가라고 긴긴 편지를 간절함을 담아서 써 보냈고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선생님이 편파적인 것 같다. 그렇다. 선생님은 말 그대로 편파적이었다. 선생님이 꼭 필요로 하는 애들이 먼저였다.

큰애가 일본말과 등하굣길에 익숙해지자 그때부터 우리 아이는 특별히 돌볼 아이에서 제외되었다. 그때부터는 그 반의 중증 장애아를 전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선생님의 편지로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으로서는 그 장애아를 위해 내 큰딸이 하루라도 빨리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시급했었다. 그러니까 우리 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돌보아야 할 그 장애아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편지에는 큰애가 그렇게 빨리 일본 글을 깨우쳐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큰애가 오기 전에는 그 장애아를 계속 돌보고 있었는데, 큰애 때문에 그 장애아를 제대로 못 봐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 큰애가 고맙다니, 나로선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장애아가 급식을 먹을 때나, 체육을 할 때나, 운동회를 할 때나 늘 붙어있었다. 선생님이 곁에 꼭 데리고 앉아서 밥도 떠먹여 주고, 운동도 같이 하거나 잘한다고 손도 잡아주고 하던 모습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정도 장애가 있으면 당연히 보통 소학교에 있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국식 정서였다. 지금도 장애가 있는 학생을 학교에 보낼 때면 그 아이의 엄마까지 아예 학교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식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그 아이가 필요한 순간들에 도와주고 있었다. 학급일로 만나는 반 엄마들도 그런 일에는 당연한 듯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내 큰애의 등하교를 돕듯이 일본인 반 애들은 그 애의 등하교도 하루도 빠짐없이 돕고 있었고, 학교 행사에도 그 애를 꼭 끼워서 하곤 했다. 결국 선생님이 그 장애가 있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그랬던 것이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들이었다.

하나와 선생님은 자신이 돌봐주어야 하는 아이들을 결국 완벽하게 도와준 셈이다. 내 큰애나, 그 장애아를.

훗날 한국에 하나와 선생님을 초대해서 서울을 구경시키고 다시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 선생님만큼 살아오면서 감동을 준 사람은 정말 드물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지나가고 스쳐갔고 나름대로의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유독 이 선생님들은 다만 공부를 가르친 선생님만이 아니라, 내 인생의 스승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사명감을 가지고 했고, 언제나 약해서 필요한 아이를 위해 애썼고, 힘내라고 용기를 끝까지 북돋워주었다.


이제 막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 시간이 삶을 배울 수 있는 얼마나 귀한 시간인가를 직접 가르쳐준 선생님들이다.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그 이전에,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일이 그 사람의 삶을 얼마나 가치 있고, 윤택하게 하는지 이 스승들에게서 배운다.


스승의 날, 우리에게 기억할 만한 스승 한 분이라도 있다면, 그분은 바로 인생의 스승인 셈이다.

언제나 똑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되는 스승들이 있어서 5월은 언제나 더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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