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의 문장은 간명해, 군더더기를 최대한 배제했다. 다만 그 사이사이에 달빛이 비단 같았다고 말하거나, 간혹 밤마다 어지러운 꿈의 조각들을 끼워 넣는다.
<칼의 노래>는 문장 속에서 다시 문장이 솟아나, 마치 민요처럼 구성지고 유장하다.
두 글의 간격을 굳이 들추자면 이순신이 극한 속에서도 여유를 가지려고 하루를 펼치고 오므린 일기를 썼다면, <칼의 노래>는 그 마음과 마음의 갈피에 접힌 한 사내의 고독을 부챗살처럼 펼쳐 보인다.
영화 <명량>을 밤 12시 심야영화로 보았다. 영화관은 한 자리도 비지 않고 가득 차있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을까. 단지 세종로 한복판에 고독하게 큰 칼을 짚고 선 사내라서. 영웅이 없는 이 시대를 아직도 근엄하게 지탱하는 사내라서.
아무려나, 명량에서 대승한 후 찐 토란을 먹으면서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라고 한 영화 속의 이순신 대사는 압권이었다. 그 잠깐 동안은 이순신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이었다.
<난중일기> 속에서 토란에 대해 읽은 기억이 없지만, 영화 속에 토란을 집어넣으니 그때가 음력 8-9월 때여서 잠시 전쟁도 잊은 한가위 날 이후의 푸근함이 더해졌다. 추후 지역 토속음식이어서 소재로 쓴 것이라는 배우 박보검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추석날 토란국은 음식 하기 까다로운 재료였다.
통영 여행을 갔을 때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거북선의 모형을 보면서, 이순신은 일기를 쓰던 감성과 무관의 용맹과 배 주조의 선험적 조화를 한 몸에 지닌, 다시는 있기 힘든 사람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했다.
그리고 남해의 다도해 섬에 가서 떠올린 이순신은 굴곡 많은 바다와 그 숨은 섬들의 잘디잔 정까지 마음에 품었던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낱낱이 시간을 풀어놓으면서 견딜 수 있었을까. 총체화된 쓰라린 삶의 진행은 아무나 살아가고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야말로 삶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근원적인 장치다.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이 절체절명의 장치는 가장 고독한 자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방법이 아닐까. 아, 살아있기 때문에 먹고 있거나, 살기 위해 먹고 있거나, 그런 쓸쓸한 위로가 어디 있는가.
<난중일기>에는 몇 가지 특이한 음식이 등장한다.
정유년 6월의 일기, 아침에 초계 원이 연포(軟泡) 국을 끓여 와서 권했지만 오만한 빛이 역력했다고 쓴다.
우리 속담에 ‘상두군은 연포국에 반한다’ 란 말도 있듯이 연포국은 상가에서 먹었던 음식으로, 이순신이 이 국을 먹은 곳은 경상도 지방이었다.
탕국, 구글 이미지
경상도 지방에서는 제사에 탕국을 쓰는데,바로 <난중일기> 속 연포국과 흡사하다. 납작하고 네모지게 썬 무와 쇠고기를 먼저 참기름에 볶아 국물을 맑게 끓인 후에 마지막에 두부를 잘게 썰어서 넣는다.
제사가 끝날 무렵은 이 탕국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가 밥을 열심히 말아먹었다. 파나 마늘이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고, 소고기가 그렇게 많이 들어간 국은 제사상이 아니면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다.
요즘의 낙지를 넣고 끓인 연포탕과 자칫 혼동하기 쉽다. 경상도에서 먹은 이순신의 연포국은 당시 전란 중이어서 이 정도면 매우 호사스러운 국이었을 것이다.
<칼의 노래>에서는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을 먹는 구절이 나오며, 두부도 몇 점 떠있다. 이 부분은 <난중일기>에서 군량으로 사용되었을 소나 송아지를 잡아서 쇠고기를 얻은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고기 외에도 특히 노루와 사슴사냥에 대해서 많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선짓국은 으레 덤으로 먹었을 것이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얼큰한 고깃국에는 향이 짙은 고사리를 빠뜨리지 않고 넣는다. 산에 가면 저절로 나고 자라던 고사리여서 따서 저장해두기 좋았을 것이다.
고사리는 산에서 나는 단백질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선짓국은 속풀이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전쟁의 스트레스와 영양부족까지 다 만회할 수 있는 음식이다.
<난중일기>에는 을미년 11월부터 그다음 해인 병신년 2월까지 청어가 주요 생선으로 등장한다. 청어는 특히 소화 흡수가 잘되는 양질의 단백질 덩어리로 필수 아미노산을 고루 함유하고 있어 동맥경화와 심장병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
로마 요리의 바탕에는 가룸(garum)이란 향이 강한 생선소스를 사용했는데, 이 소스는 그리스에서 기원하여 나중에 우스터소스로 이어진 것으로 가룸을 만드는 생선으로는 청어를 최상급으로 친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청어가 대부분이었다고 할 정도로 청어의 활용도는 높다. 바다로 둘러싸여 매우 번창했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서도 인구의 25%가 청어 산업에 관련되었을 정도로 청어는 주요 생선이었다.
<난중일기>에도 청어 132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했거나, 청어 7천여 두름을 싣고 온 것을 곡식 사러 가는 배에 세어주었을 정도로 교역에 이용한 주요 생선이었다.
남해안의 바닷가에서 자란 나는 청어는 가장 흔한 생선 정도로 생각했었다. 청어알이 든 것은 굳이 고르지 않아도 천지여서, 요즘처럼 알이든 청어를 사기 위해 가게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청어구이는 입에 넣으면 살이 녹을 정도로 사르르 했다.
이런 청어가 <난중일기>에서는 음식보다는 교환가치로 더 친다. 청어를 건조하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임란 당시 많이 잡혔던 어종으로, 청어는 고려시대는 쌀 1되에 청어 40 미(尾)를 교환한 것으로 자료에 나온다.
청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70년경은 아예 우리나라 근해에서 절멸이 되었다고 기록되는데, 이는 나라에 큰 변란이 있기 직전의 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난중일기>에 다시 겨울 청어가 잡히고 곡식과 교환하거나 찬으로 쓰기 위해 건조하는 기록들을 보면 청어가 비록 생선이지만 시대 상황을 알리는 바로미터가 되었던 어종이 아니었던가 잠시 생각해본다.
결국 오랜 전란이 이어지지만 그 끝은 이순신이란 희망의 등불이 이 땅에, 그 바다에 존재할 거라는 것을 예지한 기막힌 전령이 바로 청어 아니었을까.
삶보다 생존이 먼저인 음식
병신년 8월의 <난중일기>에는 상화(床花, 霜花) 떡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떡은 고려시대에 원나라에서 들어와 조선시대도 명물 음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가요 ‘상화점(霜花店)’이나 ‘쌍화점(雙花店)’ 등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쌍화가 바로 상화로 보여, 조선시대는 사신 영접상에까지 올랐던 귀한 떡이었다.
상화병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최초의 전통 떡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순신도 이 떡을 접대용으로 쓴 것을 보면 평소에는 해 먹기가 쉽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상화 떡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유두에 먹는 절식이라 하였으며, 주로 여름에 먹는다고 했으니, 이순신의 기록으로 보아 철이 약간 지났지만 쌀이 귀했을 전란 중에 그나마 밀가루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마련하기가 쉬웠을까.
우리 음식에는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드는 빵의 개념이 없다. 곡식으로 쪄서 만드는 떡은 있지만 밀가루 발효빵은 없었다. 그렇다면 막걸리 발효 만두로 알려져 있는 이 상화병은 거의 빵의 개념에 가깝다. 떡보다 보관도 쉬웠을 것이고, 두고 먹어도 좋았을 전란의 음식이었을까.
정유년 7월의 일기에는, 아침 식사 때 문인수가 외가채와 동아선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다. <음식디미방>에는 동아 담는 법, 동아누르미, 동아선, 동아돈채, 동아적, 동아 간수법 등이 나오는데, 동아는 소화에 좋고 열독(熱毒)을 푸는데 좋은 음식으로 전해진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위장이 나빠서 약으로 온백원을 먹는다고 기록하는데, 전장의 스트레스로 위장이 당연히 멀쩡했을 리가 없다. 따라서 구태여 많은 음식 중에 동아선을 먹은 것을 기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동아, 위키백과, 모시조개탕
외가채라고 나오는 것은 조개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와각탕이란 모시조개나 기타 조개탕을 거의 통칭하는 것으로 <난중일기>에서는 어떤 조개를 쓴 것인지 불분명하나 조개가 술독을 풀어주는데 좋은 음식으로 보면 외가채라고 하는 것이 조개탕으로 보는 것도 일리 있어 보인다.
물고기를 대하는 <난중일기> 속 이순신과, <칼의 노래>의 묘사를 보면 이순신의 모습이 오히려 단아하고 한가롭다. <난중일기>의 임진년 2월 초1일, 안개비가 뿌리다 갠 날에 선창으로 나가 쓸 수 있는 널빤지를 고르는 도중인데 때마침 망천 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었으므로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아 전선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봄 경치를 만끽했으며 정말 굉장했다고 쓰고 있다. 전란의 음식이 된 피라미떼들을 생각하면 그렇지만, 음식 특히 단백질이 필요할 전란의 영양가로는 이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잠시 공허한 시간 중에 봄 경치를 바라볼 여유가 바로 전란 중에도 일기를 쓰게 만든 그 감성이다. 이순신은 아무래도 전란에만 몸을 던지기에는 너무 아깝고 애석한, 애틋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칼의 노래>에서는 화살에 쓰이고 남은 대나무 파목으로 통발을 만들어 물밑에 붙은 생선을 건져 올렸고, 생선을 소금에 절였다는 글이 보인다.
이순신은 전장이란 생생한 현장에서, 바로 순간의 행복을 아주 잠시라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의 글이 사실임에도, 오히려 <칼의 노래>의 허구보다도 더 허구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끝없는 전란의 상처와 한 순간의 위로가 교차하면서 삶보다 생존이 더 다급했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칼의 노래>에서는 출옥한 이순신이 하동 섬진강에 당도하자, 조밥과 강에서 잡은 쏘가리에 시래기를 넣은 매운탕으로 밥상을 차린다. 무말랭이마저 귀했던지 ‘어디서 구해왔는지 무말랭이가 올라 있었다’ 고 쓴다. 쏘가리 매운탕은 민물매운탕 중에서도 그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쏘가리는 전래 그림 중에 많이 등장하는 어종으로 다복, 등용, 화합, 행복 등을 상징한다. 쏘가리를 그린 그림은 궐어도鱖魚圖라고 불리는데, 쏘가리를 뜻하는 궐이 대궐의 궐자와 흡사하다. 그런데 이런 쏘가리를 억울한 누명을 썼다가 조정에서 내쳐졌던 이순신이 막 출옥하자 그 밥상에 올렸다고 쓴 작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쏘가리 매운탕, 구글 이미지
<난중일기> 속에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이순신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기를 먹지 않자 전장에서 싸우기에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고 임금이 고기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런 임금이나마 주군으로 섬겨야 했던 신하의 충을 쏘가리 밥상으로 <칼의 노래>에서 말하려 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백성의 위에서 군림하면서 백성의 존재에 대해서 눈 감고 귀 닫은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풍자일까. 가슴이 서늘하다.
<난중일기>에는 미역 따기, 띠(芽) 베기, 가마솥으로 소금 만들기, 메주 쑤기, 둔전을 두어 곡식을 기르기, 쑥에 관한 이야기, 유밀과 만들기, 약식 먹기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이어지는 전란의 와중에서도 먹고살아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에서 이순신은 이렇게 음식들을 나열했을까.
목숨이 하루살이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먹는 것을 준비하는 것은, 더구나 당장 먹는 것이 아니라 이듬해에도 먹어야 하는 것들을 준비하는 것은 기대며 희망이다. 비극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백성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노루고기 사슴고기 꿩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개장 등이 등장하는데, 이순신이 위장이 늘 약해서 온백원 4알을 먹는 상황에서 이런 고기들이 먹기 쉬운 음식은 아니었을 것으로, 군량으로 사용한 고기류였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칼의 노래>에서는 무짠지, 미나리무침, 찐 고구마, 매생이 등이 등장하는데, 전란 중의 생활상을 상상한다면 <난중일기> 속의 음식보다 소설 속의 음식이 더 사실적이다.
영화 <명량> 이미지
음식에 관해서 이순신은 매우 엄격했던 듯, <난중일기>에서 ‘명나라 장수 장 홍유를 대접할 때에 여인들에게 떡과 음식을 이고 오게 한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각 배에서 여러 번이나 양식을 훔쳐내 간 자를 처형시켰고,’, ‘아침나절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기에 종들을 때려주고 밥쌀을 모두 갚아주도록 했다.’ 고도 기록한다.
이처럼 전란 속에서 먹고사는 일은 인간의 존엄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치다. 음식을 귀히 여기는 장수는 바로 인간을 존엄하게 보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에서 여진이란 여성을 통한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려 한 것보다는,<난중일기>에서 음식을 통해 살아있는 존재가 얼마나 비극적인지 느끼는 것이 더 빨리 현실을 직시하는 장치다.
전쟁 중에도 특이하고 맛있는 음식, 즉 귤, 유자 등을 받으면 이순신은 그 음식을 어머니에게 보내곤 했다. 전장은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훼손되는 장소이면서 또한 인간의 면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다.
<난중일기>와 <칼의 노래>를 함께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희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순간 어느 쪽이 먼저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고독하고 적막해서 전율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난중일기>를 단숨에 읽지 못했다. 군데군데 슬픔이 우물처럼 고여서 한 번씩 이순신의 몸서리치는 고독에 점염되어 탄식이 절로 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암기했던 시조. 그 뼛속 깊은 고독을 이제야 비로소 생각했다. 지금 아이들은 이순신의 시조를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전란의 두려움을 삼키며 어두운 먼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던 한 사람의 깊은 슬픔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죽음의 현장이야 말로 삶의 희망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곳이다. 생존에의 희망. 그 희망만큼 근원적이고 말초적인 소망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