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대한 탐욕이 질병을 부른다고 생각한 법정스님은 <먹어서 죽는다>란 역설적 내용의 수필에서 육식을 멀리하고 전통적인 채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찰음식이 건강식으로 주목받으며 호사스러운 음식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니 쓸쓸하다. 신문에 소개된 사찰음식의 가격이 우리 같은 일반인은 가서 먹어볼 엄두도 못 낼 정도다.
어릴 때 절에 따라가서 공짜로 얻어먹던 그 공양만으로도 사찰 음식은 충분히 훌륭했다. 아무 양념이 없는 담백한 공양 밥 한 그릇. 밥 위에 놓인 다시마튀각의 맛까지 잊을 수 없다. 주위 어른들이 초파일에 절에 갈 때면 기를 쓰고 따라가려고 별별 노력을 다 한건 순전히 그 공양밥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공양밥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선재스님이 강의하시던 사찰음식을 배우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정말 음식을 배운 게 없다고 하면 말이 될지 모르겠다.
스님은 그저 우엉 툭툭, 야채들 툭툭, 번잡하지 않게 재료들이 본래 가진 그 성질대로 조리하고, 최대한 양념을 생략하면서도 절로 뚝딱 맛난 한 그릇이 나왔다. 손질조차도 아까워, 씻어서 그대로 쓰던 재료들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던 음식을 배운 이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때의 나는 많은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한다.
음식이기보다는 자연과의 동화나 조화를 가르치던 그 음식들의 향기가 바로 무소유에 이르려는 지난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법정 스님의 수필집『아름다운 마무리』, 『오두막 편지』에는 도대체 음식이란 게 나오지 않는다. 세속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어떤 사찰음식도 나오지 않아 가벼운 실망까지 생긴다. 자연과 가까운 소박한 음식, 몸도 마음도 가볍게 비우는 음식이어서 굳이 글 쓸 거리도 안 되어서일까. 아니면 음식마저도 아무런 무게도 두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김치도 호사스러운 음식이라고 했다. 갖은양념이 들어가니 당시 서민들이 김치를 담가먹는 것은 사치였을 것이다.
근과 검을 주장하던 실학자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심어서 먹으라고 한 것은 상추며 채소다. 이것은 물만 부지런히 주어도 하루아침에 순이 쑥쑥 올라오는 채소니, 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소박하게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음식인 셈이다. 그처럼 스님의 음식도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그런 음식들로 이루어진 것일까.
스님의 무소유 음식
법정 스님의 수필집 두 권은, 산골 외딴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쓴 글들로, 마지막 생의 마무리로 다듬은 글들이다. 스님이 기거하면서 마지막 마무리로 먹었을 음식들도 있을 것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음식이란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수단인 동시에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리 뒤적여도 스님이 드셨을 음식들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푸성귀 심어 먹기, 햇차 끓여먹기가 스님이 겨우 기록한 음식이다. 채소들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신호로 심고 가꾸었다고 한다. 아니 새소리를 듣기 위해 채소들을 심으셨던 것인가.
무소유(無所有)란 산스크리트어로 시마티가를 번역해놓은 것으로 무소득(無所得)이란 의미다.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의 개념과도 같아, 가진 것이 없지만 실은 존재하며, 존재하지만 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지, 우리 같은 속인은 새겨보기도 어려운 말이다.
다만 새들이 울 때 들판에 피는 채소들을 마음속에 담아보고 싶기는 한데 이것도 무소유에 어긋나려나 걱정이다.
『오두막 편지』에 등장하는 음식은 겨우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며, 『아름다운 마무리』에는 오이넝쿨, 고춧대, 아욱, 상추, 케일, 치커리, 고구마. 가지, 호박 등으로, 『오두막 편지』보다 몇 가지가 더 나열되어 있다.
가을에 산의 돌배나무가 지천으로 열리지만, 속가에서 술을 담가먹는 열매여서 스님에게는 쓸모가 없으니 다람쥐에게 주고, 다래도 넝쿨로 주렁주렁 달렸지만 짐승들이 먹다가 남기면 그제야 차지할 것이라고 스님은 쓴다. 산자두도 풍년을 맞았지만 잉잉거리는 벌 떼에게 그 과일을 내준다.
나누는 삶. 스님이 사회 실천가였던 것도 이렇게 자연과 함께 나누면서 살던 삶의 연장선 일지 모른다.
스님이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전부는 매우 소박해서 음식이라 부르기도 힘든 것이었다. '기름지고 걸쭉하고 느끼한 것을 좋아하면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을 대하기 어려워 학처럼 곱게 늙기도 불가능하다'라고 탄식한다.
'옛날 수행자들은 갈아입을 옷과 바리때(밥그릇) 하나로 족하고, 거처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이나 옷을 탐하지 않았다'면서 음식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그 생활 자체가 '무소유'인 셈이다.
이 책들은 스님의 진솔한 생활이 담긴 책이니 작위적이거나 의식적이지 않다.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조차 아무것도 가지고 간 게 없으니, 살아가면서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있어도 더 있었으면, 올라가도 더 올라갔으면 하고, 연연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다.
차에 관한 아름다운 욕심
스님도 딱 하나, 덕이 맑고 고요하다고 믿는 차를 욕심낸다.
스님은 봄이 오면 지리산 자락 쌍계사가 있는 화개동 일대의 차밭을 찾아다닌다. 화개 차밭은 여러 차 중에서도 뿌리 깊은 나뭇잎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스님은 차를 마시는 일도 일이지만, 차밭에서 '햇차를 따는 노동을 보는 것이 진양조 가락'을 듣는 느낌이라고 할 정도로 차를 수확하는 정경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욕심낸다.
스님은 전 세계 차 산지를 여행하는데, 동인도 다질링의 고지나, 칸첸중가 히말라야의 차 수확 풍광을 즐기거나, 인도양의 눈물방울이라고 하는 스리랑카에 가서 실론티로 유명한 '누아라 에리아'의 아름다운 차밭의 풍경, 뉴델리의 네타지 슈바비 거리의 차 가게는 뉴델리에 들를 때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라고 욕심낸다.
차를 담는 그릇도 욕심낸다. 차의 덕과 같은 맑고 고요한 사람이 만든 다기에 담아 마시는 차는 맑고 고요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그 차로 인해 우리 산천의 맛과 향기와 빛깔도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다도는 선수행의 일환으로, 다선 일여(茶禪一如)라고 하며 차를 마시며 끓이는 행위도 선의 표현이다.
스님은 차를 세 번 우려 마시는데, 두 잔은 거푸 마시지만, 세 번째의 차는 맛이 떨어져 두 번째까지의 차 맛이 반감될까 보아서, 일어나 노동을 한 후에 와서 세 번째의 차를 마신다고 썼다.
세 번의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그 차를 딴 자의 공과 정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마시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는 차에 어울리는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믿으며, 차를 마시면서 세상일에 참견하거나 남의 흉을 보는 것은 차에 대한 결례라고 썼다.
‘차는 물의 마음이며, 물은 차의 몸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스님의 차에 대한 욕심은 고요와 맑음과 향기로움에 대한 수행이다. 특히 연꽃차를 대하는 청렴결백한 마음이 그렇다.
나흘 동안 피는 귀한 연꽃의 개화를 기다려 인간의 욕망대로 차로 쓰려는 것을 경계한다.일 년을 두고 단 한번 피는 꽃을 차로 쓰기엔 꽃이 너무 애처로운 탓이다.
차에도 베푸는 스님의 자비심은 자연조차 인간의 욕심대로 취하려 하지 않는 무소유에서 나온다. 집착과 욕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마음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가 무소유다. 그런 마음으로 불전에 차를 올리는 스님에게, 정신을 수양하고 도를 생각하는 시간을 차가 주는데 어찌 이 한 가지 정도야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욕심이다.
아름다운 고요를 가져가시다
스님이 『아름다운 마무리』에 인용한 차의 궁극적 목적은 전 인류의 삶의 공생에 관한 마무리로 끝난다.
인도 출신 녹색운동의 지도자 사티쉬 쿠마르는 러시아의 차 공장에 근무하는 여성들에게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는 차 선물을 받는다. 핵무기의 단추를 눌러야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 때 잠시 멈추고 신선한 차를 한 잔 마시라, 는 전언과 함께.
이 인용은 결국 스님의 잠언이며, 아름다운 이 세상의 마무리를 기원하는 스님의 아름다운 욕심이다.
우리나라의 차 유래는 신라의 선덕여왕 시절에 차가 들어와서 흥덕왕 대에 왕명으로 지리산 부근에 차를 심기 시작한다. 오랜 차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커피에 밀려 어딜 가나 외국 커피 체인점이 있고, 차를 파는 집은 어느 골목에나 겨우 있을 뿐이다.
수험생들은 졸음을 쫓기 위해 차보다 커피를 더 마시는데, 차의 카페인은 정신을 맑게 하고 활동력을 증가시키고, 탄닌은 식욕증진과 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고, 차에 있는 불소는 치아 부식을 방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이유로는 수행을 할 때 밀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 수험생들도 커피보다는 차를 마시는 것이 좋겠다.
비록 산정에서 나는 석간수로 끓이는 차를 마시지는 못해도, 차를 마시면서 그 작고 푸른 잎에서 생기와 희망을 읽는 차 마시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스님은 세계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그 욕심과, 향기 높고 고요한 묵상을 홀로 즐기고 소유했던 차의 향기를 중생에게 나눠주고 가셨으면 좋을 뻔했다. 아니면 우리가 그 향기를 주워 담지 못하고 있을까.
무소유라고 주장하던 스님은 실은 홀로 아름다운 고요를 가져가신 거 아닌지.
이제 삶에 욕심나는 일이 생길 때 잠시 한 잔의 차를 앞에 두고 스님이 하듯 명상부터 해봐야겠다.
과연 그렇게 욕심나는 일인가. 욕심나는 물건인가. 그리고 그 욕심이 채워졌을 때는 과연 그 욕심마저 끝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