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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Nov 08. 2020

관계지향의 위험한 도시락

-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축소 지향인가, 관계 지향인가



일본의 수제 도시락 브랜드 호토모토가 서울역에 오픈했을 때, 일본의 ‘에키벤’이 유행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라고 기차여행에서 도시락이 없었을까. 서울로 오가는 열차는 먹는 재미가 반이었다고 하면 맞다.


일본의 도시락은 좀 다르다. 일본식 도시락은 맛도 깔끔하지만 무엇보다 그 모양이 매우 예뻐, 화려한 꽃밭 같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게 풀밭에 펼쳐진 작은 식탁 같다.

세 아이의 도시락을 쌀 때는 화려한 일본 도시락 사진을 오려놓고 커닝했었다. 동물 모양, 꽃 모양, 장식하는 법 등 다양한 연출 방법의 일본 도시락은 기대감이 앞서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먹기도 아깝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 원인을 음식문화의 비효율성에서 찾은 일본은 도시락 문화를 발전시킨다. 삼각 김밥으로 편의점에서 널리 팔리는 오니기리도 그런 선에서 나왔다.


일본의 도시락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윤봉길 의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얼마나 일본인들이 도시락을 선호하면 훙커우 공원에 수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폭탄을 만들어갔고 검문을 통과했다.   


어릴 때 어른들은 꼭 벤또라고 불렀다. 현재 학교서 중식, 석식까지 해결하는 아이들이 도시락의 의미를 알까. 우리에게 도시락은 가난, 부끄러움, 즐거움, 난로 등 온갖 다양한 이미지들과 같이 한다.

 

혼 분식 장려 기간 동안은 도시락은 검사의 대상이었고, 김치 냄새 풀풀 나는 도시락은 뚜껑을 열기도 민망한 부끄러움이었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마저도 싸올 수 없어서 슬픔의 대상이었다. 이 도시락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백화점 푸드 코트에까지 도시락점이 출격해있는 것을 보았다.

 

남이섬에 갔을 때, 조개탄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쌓아놓고 데워 파는 것도 사 먹었다. 단지 밥을 도시락에 담아놓은 것인데, 굳이 사 먹까닭은 이야기가 담겼고, 추억이 담겨서였으리라.


 

이 책은 영화를 먼저 보고 추리 기법이 궁금해서, 또 도시락에 마음을 빼앗겨, 수학 외는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던 한 수학자의 감정의 물레를 훔쳐보고 싶어서 결국 책도 읽었다.

고등학교 수학선생인 이시가미는 좋아하는 여성 야스코가 근무하는 ‘벤덴데이 도시락’점에 매일 아침마다 들러 ‘오늘의 도시락’을 산다.

  

이어령은 일본의 도시락 문화를 축소지향의 문화의 한 예로 든다. 그만큼 일본의 도시락은 작은 개인용 식탁과 같다. 그럴 때 일본의 도시락 문화는 개별적인 문화로 볼 수 있다. 우리처럼 한 뚝배기 속에, 한 냄비 속에 너도나도 숟가락을 디밀어서 떠먹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도시락 안의 색채와 구성의 조화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럴 때 단순히 축소지향의 문화로만 볼 것이 아니라, 편리한 이동성과 도시락 문화로 인한 관계의 문화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야스코에게서 사 먹는 ‘오늘의 도시락’은 이시가미에게는 관계의 도시락이다.   

다만 이 관계가 순수함에서 왜곡으로 흘러가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시가미는 다른 종류의 도시락은 한 번도 사지 않고, 오로지 ‘오늘의 도시락’만 산다. 그에게는 현재만 존재했을까.     


 수학만이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이시가미가 수학의 논제가 풀리지 않아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 이웃집에 이사 온 야스코와 그녀의 딸 미사토가 이사 떡을 돌리기 위해 벨을 누른다. 이시가미는 죽음에서 벗어나고, 음식은 구원의 상징이 된다.  



사랑과 구원의 도시락

 

야스코가 폭력적인 전남편을 살해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시가미는 그 여성을 위해 매우 치밀하고 지능적인 알리바이를 만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풀기 어려운 이 알리바이는 결국 이시가미의 라이벌이었던 천재 물리학자에 의해 풀린다. 마침내 이시가미는 살인의 모든 굴레를 쓰기로 하지만, 이시가미의 순수한 사랑을 알게 된 야스코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음을 고백한다.

  

매일 아침마다 야스코가 파는 '오늘의 도시락'을 사러가는 이시가미에게 음식은 사랑의 매개체였다. 사랑을 위해 어떤 위험도 무릅쓴 이시가미의 범죄는 제목처럼 헌신과 희생이란 미적감정으로 고양되어 독자가 미처 범죄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일본식 오벤또의 의미는 데리고 다니는 애첩이란 속어로도 쓰인다. 따라서 맛있고 예쁜 도시락을 사는 행위는 이시가미에게 사랑의 감정과 연결된 장치지만 그 사랑은 결국 왜곡된다. 사랑은 그 무엇도 넘어설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가끔은 넘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134회 나오키상 수상, 완벽한 알리바이를 구사하는 천재 수학자와 그 트릭을 풀어가는 유가와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 반전의 트릭 등, 이 책은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지적인 추리가 흥미롭다.



‘오늘의 도시락’만 사는 이시가미는 ‘오늘’이란 시간은 이전과 이후의 시간들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망각했다. ‘오늘의 도시락’이 더 이상 현재에만 존재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세상은 이시가미의 세계였던 수학적인 계산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스코가 이시가미의 마음을 알고는 전남편 도시가미를 살해했다고 자수하는 것은 어떤 계산으로도 풀 수 없다. 계산보다는 인간의 감정이 더 우위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배후까지 이 작품은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니체는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고 했다.


이시가미가 사랑에 대한 희망으로 두려움을 잊었듯이, 혹은 선악에 대한 관념도 희박해졌듯이 우리의 삶이 돌아가는 힘은 무모한 사랑도 한몫한다. 비극적이지만.


 

오늘 한 개의 도시락을 싸서 풀밭에 앉아 먹거나, 아니면 도시락 점에 가서 사 먹으면서 사랑의 힘에 대해 잠시 생각해도 좋겠다. 다만 그 시간에는 이시가미의 마음이 되어 혼자 먹어야 한다. 세상이 수학적으로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지 않듯이, 사랑 또한 그 모습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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