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麥)는 보리(菩提)의 세계를 얻고

- 『보리피리』, 한하운, 인간사, 1959년

by 이지현

시집 속으로



낡은 겉 표지를 들추면 안의 표지는 멀쩡하다




함경남도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한 한하운(韓何雲, 본명 한태영)은 1927년인 9세에 나병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온천 등을 찾아다니며 요양한다.

1939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나병으로 확진받으며 하운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해서 1945년부터 개명하여 사용하였다.지주 집안의 장남이었던 한하운은 토지개혁이 본격화될 무렵에 월남했다. 북한의 지주제를 몰락시키는 토지 개혁 당시 황순원, 선우휘, 안수길, 오영진 등도 월남하는 작가 그룹이었다.


한하운은 처음에 동생이 가담한, 1946년의 함흥 학생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7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면서 나병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1차 월남한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월북했다가 월남했던 혐의로 인해 수감되기에 이른다. 다시 탈옥해서 2 차 월남하고, 다시 월북, 그리고 3차 월남한다.

여러 차례의 월남과 월북은 고향이 이북에 있다는 점과 나병에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이기도 했다.



왼쪽부터 <보리피리> 발간 년도 1959년, 3판. 초판은 1955년에 발간. 가운데는 한하운 시인의 사진.



시 <靑芝有情>에서 '몇 백번 죽엄을 고쳐 죽어도 자욱 자욱 피 맺힌 / 그리움과 뉘우침이 가득한 문둥이 아니겠습니까' 라며 문둥이를 천형의 병으로 인식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에는 시심이 떠나지 않는다.

시 <踏花歸>에서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 시악씨 같이 서럽지도 않게 / 가슴에 안기네' 라고 말하지만 '이 밤에 남몰래 떠나가는가'라고 물으면서 천형에 대한 피맺힌 인식에 절규한다.


왼쪽부터 <보리피리> 목차, 당시 <인간사> 출판사를 경영하던 박거영의 '한하운 시집을 내면서'가 시인의 '자서' 뒤에 붙어 있다


한하운이 얼마나 자신의 병에 대해서 체념하고 절망하고 있었던 지는 다음에 시에 잘 드러난다. 이 시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그러나 의학을 전공하는 양에게 / 이 너무나도 또렷한 문둥이 병리학에 / 모두가 부조리한것 같고 / 이 세상에서는 안될 일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앞을 바라볼수 없는 이 사랑을 아끼는 / 울음을 곱게 곱게 끄칩시다.'('리라꽃 던지고' 중에서)


라고 하면서 한 여성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문둥이라고 자책하고 단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아무리


'나는 문둥이 새끼 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 올시다'('나는 문둥이가 아니 올시다')고 반복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 거리 에트란제'('명동 거리'), 로 인식하거나, '저 느티나무 아래서 성한 사람들이 / 나를 쫓아 냈었다 / 그날부터 느티나무는 내 마음속에서 / 앙상히 울고 있었다'('국토 편력') 고 하거나, '내 조상에 / 문둥이 장손은 茶禮도 없다.'('秋夕달')


함으로써 발붙일 수 없는 현실적인 냉대에 절망한다.


한하운 시인은 걸인이 되어서 동냥을 한다. 월남 후 쓰레기통 옆에서 노숙을 하고 나환자 수용소에서 시를 쓰고 명동성당의 방공굴에서 원고를 정리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한하운은 명동 일대에서 시를 팔아서 생계를 해결하거나, 용산 삼각지 다리 밑, 강릉, 강원도 횡성군의 산중 등을 떠돌면서 생활한다. 그러다가 명동에서 시를 팔 때 눈에 띄어서 시가 게재되기 시작한다.

나병환자들이 수용된 소록도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다.


'차이곺스키-의 <비창>이 / 이 격리된 癩療養所(나요양소)에', '세균학도 없이 / 전파에 흐흐 느끼어 온다' ('비창' 중에서)


이 시가 말하듯 나병환자들의 열악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공간에서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지지않는 보리의 세계


보리(麥)는 보리(菩提)의 세계를 얻고

한센병으로 인해 흔히 천형의 시인으로 알려진 한하운은 처음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쓰게 되면서 1953년 10월에 서울신문 편집국에 직접 나타나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소문을 잠식시킨다.

신문사에 와서 즉석에서 써놓고 간 시가 바로 '보리피리'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치안국에 나타나서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시인의 자서를 살펴보면 1949년에 첫 시집인 『한하운 시초』를 발간 후에 유랑생활에서 벗어나 '나환자의 인권보장만이 내가 뜻하는바 전부'라고 하면서, 같은 나병 환자들의 구나사업에 뛰어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로부터 2년 후인 1955년에 한하운은 제2 시집인 『보리피리』를 발간하면서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다.

그러니까 '보리피리'는 시집 제목이면서 그의 대표시가 된다.


하필이면 왜 보리일까. 보리는 민중들에게는 주식일 수밖에 없었던 식품이었다.

벼는 농사를 짓지만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곡물이 아니었던 탓에 김유정의 소설『만무방』처럼, 자신의 논에서 벼를 훔치는 모범 경작생인 응오 같은 만무방도 나온다. 그러나 그 대체 곡물인 보리는 민중들이 먹기에 만만한 농작물이었다.

보리는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작물로 수확기가 빠르고, 벼와 자라는 시기가 중복되지 않아 이모작 하기가 쉬웠다. 보리는 겨울작물로 노는 땅을 이용해 재배하고, 병충해의 피해가 적어 쉽게 기를 수 있는 농작물이었다.

조선시대 농법서인 『농사직설』의 기록에도 보리는 농가의 급한 식량원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봄의 춘궁기에 고마운 작물이었다. 오죽하면 이때를 '보릿고개'라고 했을까. 이때 보리개떡은 식량이 귀하던 시절 보리가 수확되면 보리를 갈아 거친 가루를 반죽해서 떡을 만들어 허기를 면하던 음식이기도 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 속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떠나는 주몽에게 곡식을 챙겨준다. 거기서 주몽은 보리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서 보리는 이처럼 우리 민중과 긴 연원을 가지는 곡물이다.


초등학교 때는 연례행사가 보리밟기였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불던 벌판에 초등학교 저학년들인 우리들까지 동원되었던 보리밟기는 이제 생각해보니 일손이 모자라던 시절의 서글픔이었겠지만, 그때는 추우면서도 한편 재밌기도 했다. 손가락 반 마디쯤 올라온 초록 순들 위에 살얼음이 얼었고, 우리는 왜 살아있는 것을 밟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더 세게 꾹꾹 밟아'라고 하던 선생님 말을 마치 음악처럼 들으며 리듬을 타고 온 보리밭을 돌아다녔다. 다른 때는 밭에 들어가면 혼나면서 왜 보리는 밟아야 했는지 아주 오랜 후까지 알지 못했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라고 하거나,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 / 눈물의 언덕을 지나 /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중에서)


라고 하면서 한하운이 봄의 온 산하를 유랑해야 했을 때 보리는 온 반도에 천지였을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들판의 초록물결은 보리였을 것이고, 그는 그 솟아난 대궁의 어느 마디를 꺾어 보리피리를 벗 삼아 불면서 떠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약용의 한시 <보리타작>에서는 타작하는 검게 탄 농부들을 보는 건강한 현장에서 왜 자신이 벼슬길에서 그렇게 헤매고 다녔는지 자탄한다.

이처럼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이기고 푸르게 자라서 넘실거리는 보리야말로 한하운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위로였고, 보리피리의 '필 닐니리'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응원가였을 것이다.





T. S. 엘리엇은 '우리는 누구나가 다 환자다'라고 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환자였던 시인은 말 못 할 곤욕을 치르면서도 민요조의 아름다운 리듬이 드러나는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을 내면서 시인 스스로 '노래를 불렀을 뿐 시를 쓰지는 않았다'라고 말하는데, 이 시집이 '지난 방랑 여정을 엮은 회상기'라고 자평하면서 내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행히도 한하운은 나병 음성 판정(1959)을 받고 제약회사, 출판사 등을 창립하며 사회에 복귀한다.

『보리피리』(1955)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도 제작되는 등 안정되기 시작한다. 나병 환자들의 복지를 위한 일에 힘쓰면서 생활하다가 1975년 인천시 자택에서 뜻밖으로 나병이 아닌 간경화증으로 타계한다. 자신의 천형을 극복하고 시인으로 거듭난 것은 인간 승리다.


그런데 아직도 한하운의 시집을 열면 시에서 '피-ㄹ 닐니리'라는 위로의 곡조가 들리는 것은 보리라는 힘든 시절을 딛고 자라는 농작물때문일지 모른다.

그가 시집 제목으로 '보리피리'를 내세운 것은 그의 유랑이 우리 민중의 고달픔과 닿았고, 그 속에서도 보리처럼 겨울을 이겨낼 것이라는 희망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 문둥이 우는 밤 / 번뇌를 잃고 / 돌부처 관세음보살상 / 대 초월의 열반에 / 그리운 정 나도 몰라 / 生生 世世 / 귀의하고 살고 싶어라.'(관세음보살상' 중에서)


라고 노래했듯이, 그 보리(麥)는 결국 보리(菩提)의 세계를 얻으려는 삶의 수행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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