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뒤 표지가 다 떨어져 나가고 속만 남았다. 시간의 흔적이고 세월의 흔적이고, 또 잘 지녀야지라는 마음이 모자란 어린 시절이어서 그랬다.
너무 어려서 이 시집이 '아주 슬픈 시집'으로 남으리란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내 손에 끝까지 남아있게 되었으니 그것만도 조금은 덜 슬픈 시집이면 좋으련만.
이 시집은 소월시집의 원본들을 전재해서 작사가이자 아동문학가며 시인인 박화목과, 시인이자 기자며 교사를 지낸 김원태가 감상을 쓰고 있다.
시 비평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감상이다. 널리 알려진 소월의 유명한 시들은 이 한 권에 거의 실려있다. 각 시마다 마치 주석처럼 몇 줄의 감상평이 붙어있다.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1966년 11월 남창문화사 발행, 정가는 150원, 시 뒤에 감상을 단 형식
소월의 시 제목처럼 나는 아주 <먼 후일>인 지금, 다시 이 시집을 꺼내서 아직도 어린 시절에서 영영 멈춘 친구를 추모한다.
그날 조례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은 나에게 가정방문을 가야 하니 방과 후에 남으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쭉 담임을 하신 최숙희 선생님은 평소에 웃어도 심각하고 늘 진지한 모습이지만, 그날따라 묘하게 내 마음을 울리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기억이란 때로 매우 낯선 옷을 잘 걸치는 것이라서 그날 이후로 내가 덧붙인 인상일지도 몰랐다.
벌써 며칠째 친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당시 교실 좌석이 비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부모 일을 도와주거나 동생이라도 있으면 일하러 나가는 부모 대신 돌봐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은 가정방문으로 가셔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부모님을 설득하곤 했다.
동네가 익숙하지 않은 선생님을 몇 번인가 따라가서 친구들 집을 가르쳐주어야 해서 잘 알았다. 그러나 며칠 친구들이 나오지만 곧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날도 빈자리 친구한테 가려니 생각했다. 텅 빈자리는 썰렁했다. 당시는 아침도 못 먹고 오는 아이들이 많아서 옥수수빵 급식이 나오거나 옥수수죽을 끓이면 나는 특히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오는 그 애의 책상 안에 나눠주고 남은 빵을 몰래 두곤 했다. 내 짝인 적이 있어서 잘 알았다.
선생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역시 그런 일로 생각했다.
그 애의 집은 앵지밭골로 가는 길에 있어서 선생님과 함께 논길과 밭이 한데 뭉뚱그려진 길을 걸었다. 그 길을 한참 따라가면 초등학교 내내 소풍을 가던 농원이 나오곤 했다. 무학산은 그 안이 제법 푸근하게 넓었다.
농장집 딸도 나중에는 친구였는데, 4학년 때 그 집의 무화과를 홀랑 다 따먹은 기억도 있는 그 길은 늘 좁고 흙이 푸석푸석했다.
선생님과 내가 산과 마을의 중간 정도에 있는 그 아이의 집에 당도하자 마루 끝에 간신히 걸터앉은 그 친구의 엄마가 마룻바닥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손바닥으로 마루를 탕탕 두들기며, 아이고 우짜노, 라는 소리를 반복해서 내지를 때도 나는 친구가 죽은 줄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선생님은 국민학교 1학년인 아이들에게 친구가 죽었다는 말을 차마 못 했고, 그 엄마는 나를 보자 그냥 울음이 봇물 터지듯 일시에 터져버린 것이다.
울음이 조금 가라앉은 그 엄마는 선생님께 나를 가리키면서 '바로 저 아이냐'라고 물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린 마음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친구가 죽었다고 순간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 순간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을 정도다.
생애 처음 알게 된 시인이 소월
울음을 약간 그친 그 엄마는 주섬주섬 어디선가 책 1권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 내 손에 그 책을 꼭 쥐어주었다.
"우리 아아가 죽음 시로 이 책은 꼭 니한테 전하라고 유언했다 아이가"
바로 그 책이 『소월시 감상』이었다.
물론 내가 그 아이에게 그런 책을 빌려주었을 리 만무했다. 소월이 누구인지, 시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던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1살 어리게 들어가서 늦되어도 한참 늦되고 어리바리한 아이였다.
아마 시집 뒤에 선생님이 잊지 말라고 국민학교 이름과, 학년과 반, 그리고 그 친구의 이름을 썼을 것이다. 그 책을 받아 들고 비로소 나도 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냥 슬펐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을 비로소 알았고, 무언가 내게 남겼다는 것을 알았고, 다신 볼 수 없는 어떤 실체에 대해서 그냥 슬펐을 것이다.
그 엄마는 거칠거칠한 손으로 내 얼굴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아마 딸이 생각나서이겠지만 나는 책을 잡은 손으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두려움과 슬픔이 합쳐진 눈물이 밀려왔다.
선생님과 돌아오면서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날 아침에 학교를 못 간 그 애는 앵지밭골 가는 오르막 길에서 무겁게 낑낑거리고 올라가는 누군가의 리어카를 밀어주었다. 그런데 그 리어카가 무게 때문에 놓쳤고, 오르막 길에서 멈출 줄도 모르고 내리닫았다. 그 바람에 친구는 리어카에 깔려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어린 아이다 보니까 죽은 것이다. 그 친구가 죽기 전에 꼭 그 책을 나에게 전해달라고 엄마에게 당부를 해서 오늘 같이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친구 엄마가 나를 꼭 한번 보자고도 했다지만 선생님은 내가 그 친구를 영원히 기억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왜 친구가 나에게 그 책을 남겼는지. 그러나 그 책은 내게 남았다. 그리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국민학교를, 중학교를, 고등학교를 건너와서 지금까지 나에게 머물 동안 험하게 남아있었다. 그냥 버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 쭉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리어카를 밀다가 돌아보면서 나를 보고 환히 웃는 꿈을 자주 꾸곤 해서 마치 현실 인가하고 잠에서 깨어서 기억하곤 했다.
그 친구가 왜 시집을 나에게만 꼭 남겼는지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 그때 내가 잘한 건 받아쓰기만 하면 백점 받은 것 외에 글쓰기를 한 기억도 없고, 내가 동시라도 썼던가라고 기억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알 수 없다. 국민학교 때부터 두 개의 교실 정도를 턴 작은 도서관에 박혀 있던 일 외는 기억나는 일도 없다. 그 엄마조차 그냥 죽은 딸이 고맙다고 한 외는 그 이상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영영 수수께끼로 남았다.
친구의 유품으로 인해 소월의 시집은 나에게 남았고, 내 생애 처음으로 알게 된 시인도 그러니까 김소월이 된 셈이다.
더 궁금한 점은 국민학교 1학년인 친구가 어떻게 소월 시집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온 동시도 모를 나이였다. 그 친구의 집이 또 소월 시집을 볼 정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혼자 이 시집을 볼 때마다 추리한다.
그 시절 고물상들은 참 흔했다. 마을을 좀 벗어난 쪽으로는 공터들이 많아서 고물상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친구는 동시집 같아 보이는 것을 하나 주웠거나 얻어서 가지고 있다가 나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저 나에게. 왜냐고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누군가에게 그걸 주고 싶은 때가 있듯이 그렇게 주고 싶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시집으로 인해 나도 전혀 기억조차 없는 내가 거기 서 있는 셈이다.
돌려서 생각하면 그 친구는 너무나 감성이 넘치는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의미는 모르지만 시를 읽을 줄 아는 어린아이. 그런 아이라서 신은 너무 빨리 데리고 가버린 것이다.
시집 속으로
시집의 목차
소월의 시를 가르칠 때마다 죽음부터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이 일 때문이다.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은 소월이 요절하자 <대한매일신보>에 소월을 추모하면서, '소월은 매우 이지적인 사람 이외다'로 시작하는 글을 실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감정이 넘치는 소월이 아니라, 참고 견디는 소월이 있다. 그래서 그를 '한'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한이란 욕구나 의지의 좌절에 따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무의식적으로 얽힌 응어리를 말한다. 그 한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스스로 치유해보다가 안되면 무당을 부르기도 한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때는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소월의 한은 좀 특이하다. 흔히 비교되는 고려가요 <가시리>나 <서경별곡>으로 살펴보면, 참고 기다리는 것은 전자와 가까운데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적극적인 후자와 가깝다.
<진달래꽃>에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말하지만 그 반어적인 귀결은 전자의 온유한 기다림보다는 악착같이 따라가려다가 못 가고 뱃사공에게 저주를 퍼붓던 후자의 독한 마음이 들어있다.
내 친구가 고물상에서 얻거나 주웠더라도 왜 하필이면 소월이었을까. 국민학교 1학년 아이가.
그 문제는 내가 소월의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모티프도 되었다. 소월의 시는 국민학교 1학년이 읽던, 가슴에 한이 맺힌 어른이 읽던 그 정서는 어느 쪽이든 유사하다. 그렇게 쉬운 말로 누군가의 마음을 쿵 두드리는 것이다.
쉬운 언어로 보편적인 감정을 말하고, 그 소재는 자연물이 많다. 그리고 읽으면 마치 노래하는 듯하다. 소월은 누군가의 마음을 단숨에 움직이기 아주 쉬운 시 쓰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는 어렸지만 너무 쉽다고 생각한 소월의 시집을 나에게 남긴 것이리라.
시집의 목차
어린아이에게 주어진 가난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넉넉하고 풍요롭게 먹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학교를 오지 못할 정도로 지치던 가난 속에서도 소월의 시집을 꼭 가지고 있던 그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어린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먹지 못하는 가난이었을 것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거대한 불행은 인간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일어나기보다 외부적인 환경에서 일어난 비극은 소월이 마음에 담고 있는 세계기도 했다.
시집의 목차
소월의 비극적 삶은 그의 주변 환경에서 더 온다. 거기에 예리한 감성을 가진 한 시인에게 암담한 시대가 던진 절망감이 그 한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의 도피' 기제로 보면, 자아를 보존하려고 의도적으로 한을 선택하여 내면세계로 몰입해 들어간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소월의 고향인 평북 정주는 이승훈과 춘원 이광수 및 후일 스승인 안서 김억의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주는 소월이 신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소월은 아버지가 철도 공사장에서 몰매를 맞고 정신질환에 걸리자 내성적 성격으로 변한다. 조부의 손에 성장하면서 충돌하고 갈등한다. 어머니의 지나친 현실적 헌신은 오히려 단절감만 커진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도 소월의 첫째 숙모 계희영은 어린 소월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옛날이야기나 고전 소설들을 말해주면서 소월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소월이 만난 오순은 이후 시 <접동새>를 쓰는 계기가 되며 소월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여성이 된다.
소월이 오산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교장이 이승훈이었고, 조만식이 교사였다. 그리고 안서 김억을 국어 선생님으로 만나게 되면서 시인 소월이 탄생한다.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조부에 의해 끌려갔고, 이때 안서와 더불어 지내며 술 먹고 울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시집의 목차
소월은 1920년에 이르러 안서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고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이후 동경 유학도 떠났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충격을 받고 귀국한다.
그 후 안서가 주선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여 경영했지만 부진하였고, 오순의 죽음과 유일하게 가까이 지내던 나도향이 요절하자, 소월은 더욱 절망한다. 시인 이장희의 자살은 소월의 자살 충동을 심화시킨다.
1934년 12월에 아편을 산 후에 소월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때가 서른셋이었다.
사실 소월 이전에 1910년대에 최소월이 존재했다. 대학원 시절에 리포트를 쓰면서 최소월을 발견했을 때 잘못 보았나 하던 놀라움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도 천재적인 시인으로 주변에 알려졌지만 요절을 한다. 바로 그 소월의 호를 가져온 것이 김소월이다. 우연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소월은 요절한다.
이 같은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에 의해 소월은 그의 감수성에 깊은 한을 새길 수밖에 없었다. 안서가 소월의 성격을 이지적이라고 했을 때, 그 이지적은 냉철하고 논리적인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한을 깊이 안으로만 들일 수밖에 없던 성품을 말한 것이다.
선험적으로 체득한 한
어린 친구가 왜 그 많은 시인들의 시집 중에서 김소월 시집을 가지고 있었을까에서 비롯한 소월을 알아가는 과정은 남다른 감정을 선사한다.
친구는 소월의 시를 읽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동시로도 착각했을 수 있는 소월의 시를 읽으면서 소월의 한에 접목해서 알 수 없는 한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심오한 말로 굳이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느끼는 것이 시이지만 소월에게 시는 특히 더 그렇다. 소월의 시가 사람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남다른 느낌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로도 많이 불리는데 하등의 이상함도 없는 시가 소월의 시다.
니체는 "삶이란 죽음에의 의지를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내치는 것을 의미한다.” 고 했다.
소월이 내면적으로 깊은 한을 쌓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 쪽으로 다가갔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의 깊이만큼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지적이었을 것이다. 그 한을 푸는 방식이 소월에게는 시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은 지친다.
시를 써도 해결되지 않는 삶은 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외적인 문제가 더 컸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소월시집을 남긴, 내게는 영영 어린 나이로만 남은 친구를 생각하면서 시를 쓴다. 시를 쓰지 않으면 빚진 것처럼 사는 것 같아서 시 쓰는 흉내라도 낸다. 내 시가 비록 하늘나라에 있을 친구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냥 닿고 싶어서 쓴다. 가장 먼저 소월을 알게 한 친구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