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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Jan 22. 2021

중2병, 적어도 불치병은 아니야

- 혼자 아픈 아이를 더 돌아보아야


모든 게 재수 없는 나이



아는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 아이가 중2인데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럴때면 나는 중2들을 먼저 떠올려본다. 어머니도 이해하고, 아이도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이상하고 낯선 딜레마에 빠진다.


'아, 재수 없어.'

중2 아이들은 서로서로 이렇게 말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학원 숙제가 많은 것도 재수 없고, 학교 선생님들도 밥맛이고, 엄마 잔소리도 너무 지겨워서 하루 종일 재수 없다.   

재수 없는 것은 물론 그게 다가 아니다.  

써먹을 데가 없는 수학은 왜 배우며, 유학 갈 거 아니면 토플은 왜 하며, 필요도 없는 과학에, 폰에 있는 지도 보고 가면 되는 곳을 왜 배운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재수 없는 것이 본인들을 빼고는 전부다.

불평불만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제 중2가 되는 아이들은 재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하긴 평생 살면서도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여길 정도의 재수 있는 일이 그다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중2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대놓고 재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일생 살면서 밋밋하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이내 까르르까르르 웃곤 한다.  

까르르 웃는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재수 없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한창 때다. 모든 것이 다 억울하다. 몸을 널빤지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서라도 세상에 부딪치고 말겠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때다.  

중2의 자식을 둔 엄마들을 만날 때면,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걱정 마세요, 다 과정이니까요 하고 참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건 내 경험에서 나온 통계니 거의 맞는 말이다.  


중2병이 갑자기 중2가 되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중2의 전조는 거의 중1-2학기쯤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2에 절정기를 맞다가, 남학생들의 경우는 중3의 2학기쯤부터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하다가 고1 정도부터는 이제 부딪혀야 하는 삶이 자신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하다는 것을 깨닫는지 거진 낫는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건 정말 살아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건 심리학자처럼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용어를 들이대지 않아도 그냥 아주 많은 아이들을 겪어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재수 없다고 말하는 중 2만 지나면, 서서히 낫는 병이니 구태여 강한 약을 쓸 필요도 없다. 쓴다고 해도 약발이 받는 척도 않는다. 받는 척하다가도 금세 떨어져 버린다.




기다려야 지나가는 병



그냥 기다려야 한다. 조심해서 바라보면서.  

누구나 중2를 거친다.

여학생을 만나러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야동을 보면서, 새 핸드폰이 갖고 싶어서 일부러 물에 첨벙 빠뜨리거나 부속품을 일부러 망가뜨리거나, 새 옷을 사달라고 하기 위해 옷을 일부러 분실해 버리거나, 그동안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이 하루아침에 지루하게 느껴지자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학교나 학원에서 잃어버렸다고 부모에게 말하면서, 또 파마머리나 염색머리를 하고 싶어서 방학이면 미용실에 드나든다. 이 이야기들은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들 속에서 주옥처럼 골라낸 것이다.

그래도 개학이 되면 무서운 학주욕을 해대면서도 다시 파마머리를 풀거나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2는 지나간다. 그러면서 모두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대학을 갔다. 이 과정 속에서 내 통계는 서서히 누적되어 중2도 스쳐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더 살 수도 있다고 하니, 인생 100년 중에 중2는 단 1년이고,  단 한번뿐인,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시간의 횡격막쯤으로 내버려 두자고 참고 또 참으면서 진다.    

들숨 날숨을 한번 크게 쉬어 보고 싶은 때가 있듯이 그럴 때로 간주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면서.


사춘기, 중2병, 질풍노도.

이 시기를 부르는 이름이 많은 것은, 그 이름에 묻어 한번쯤은 그래도 되는 때로 내버려 두기 위해서가 아닐까.

또 이 이름값을 하느라고 이미 영리하다 못해 영악까지 한 아이들은 이때를 사골국처럼 재탕 삼탕으로 우려먹는다.


"선생님도 우리 같은 때가 있었어요."

"그럼, 나도 있었고, 너네 엄마들이나 학교 선생님들도 있었지."  

"그런데 엄마나 아빠, 선생님들도 다 없었다던데요. 왜 요새 애들만 별나냐고 하던데요."


그러면 나는 동병상련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우리는 귀밑 1센티로 선생님들이 자로 정확하게 머리 길이를 쟀다. 앞머리는 또 어떻고, 완전히 쫙 붙여서 핀으로 꽂고, 여기까지만 하면 애들은 우엑, 촌스러,라고 또 까르르하며 배를 끌어안고 웃는다.

교복을 입고 시내를 다녀야 했고, 영화도 단체 영화 외는 보지 못하고, 선생님들이 거리를 다니며 사복 입은 애들 다 잡았다고 하면 갑자기 엄청 불쌍했던 세대에 대한 연민이 발동하는지 이제는 웃지도 않는다.   

그러니 너네는 이 정도면 어른들이 아주 후한 거다. 우리도 너네처럼 치마 짧게 입으려고 여러 번 허리 접고 그러고 살았다고 하면 아주 동지애를 느낀다는 듯이 순간 공감대가 형성되며 조용해진다.  


이해해주는 척하는 것이 중2를 만나면 쓰는 방법이다.  

중2를 피해 갈 수 없다면 그들과 함께 즐겨라가 경험이 내리는 명령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중2는 1년 후면 지나간다. 참자, 참자, 참자, 이렇게 열심히 도를 닦는다.  

중2가 지나면, 여태 지나갔던 아이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왜 그때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테니까.


중2를 지나면 제일 우습고 기가 막히는 일이, 새로운 중1이 들어왔는데, 정말 못 말린다느니, 요새 애들은 왜 그래, 정말 티꺼워라고 하면서, 그동안 그들이 제일 싫어하던 기성세대가 되어 벌써 아래 학년들 위에 군림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중2병도 어느새 지나가고 있다는 유쾌한 예감을 접한다.   




홀로 아픈 아이를 찾아봐야 할때



중2병은 본래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한 일본의 개그맨이 라디오에서 '중학교 2학년생이라면 할법한 행동들'을 어떤 병의 증상이라며 희화하며 라디오 청자들로부터 사연을 모집하며 탄생한 한 개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으로 건너오며 사춘기 애들이나 할 법한 무개념한 행동이나 짜증 나는 모습을 가리키는 등 욕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반항도 멋으로 생각하는 일시적 괴대 망상증임이 틀림없지만, 요새 애들은 또 자신들의 상태마저 알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중2병을 앓는다.  

우리가 앓던 중2병처럼, 문학책속에 푹 파묻혀 있거나, 무엇인가 쉬임 없이 끄적거리면서 설레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게임과 연예인과 아이돌에 빠진 중2지만 일생에 중2가 딱 한 번이니, 그냥 봐주고 싶다.


적어도 불치병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렇게 드러내 놓고 중2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아니다.

드러내지 않고 홀로 앓고 있을, 혹시 혼자 너무 아파하는 중2가 있는지 그게 더 걱정이다. 대놓고 아픈 건 수술을 하면 되지만, 속으로 혼자 아픈 건 어떤 약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얌전하고 때로 공부만 하는 중2가 더 걱정이다. 홀로 아픔을 삼키는 것을 기특하게도 아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아픈 중2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애들에게서 간혹 왕따가 되거나, 스스로 왕따를 시킨다.  

홀로 아픈 아이를 가끔은 더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중2병을 앓는 것같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그냥 기다리자고 한다. 어른이 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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