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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r 04. 2021

스트레스 풀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 자식 돌보기 스트레스는 이렇게


합격 노하우를 들어야 하는 시간



"선생님께 꼭 식사를 대접할 일이 있어요."

몇 년 만에 온 전화여서 난데없었지만, 그 아이를 가르치다가 서울대를 들어가서 이미 축하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으니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어서 바쁘다고 사양하자, 그 어머니가


"행시 합격했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내가 그 어머니한테 밥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로 약속을 했다. 그런 어머니는 반드시 만나서 노하우를 열심히 들어야 한다. 억만금을 주고도 듣지 못할 노하우를 그런 어머니들은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다. 





아이가 잘했을 때는 그 아이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건 아이의 문제고,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반드시 들어두면 도움이 되었다.

워낙 운전을 잘하던 엄마라서 그날도 나를 태우러 와서 대치동 은마사거리에 있는 일식집으로 갔다. 그 집이 아주 맛있고, 깔끔하다면서.

내가 살 각오로 갔지만 그 엄마는 무슨 소리냐고, 여태까지 보다 더 정성 들여서 음식까지 내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열심히 탕도 떠주고 회랑 초밥이랑 연신 내 앞으로만 밀어놓았다.


그 엄마는 참 존경스럽게 바라보던 엄마였다. 아이가 중학교 수석 졸업, 여고 수석 입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대를 들어갔다고 해서 그 엄마를 존경했던 건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자식을 가진 엄마라면  부지기수로 많이 알고 만났다.





그런데 그 엄마는 언제나 달랐다. 늘 겸손했다. 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지만 한 번도 자만심을 가져본 적도 없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모든 것을 배우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새벽 4시 반이면 아이를 위해 절에 가서 새벽기도를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 큰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한테도 새벽기도를 같이 가자고 권했던 엄마였다.


물론 나는 그렇게까지는 지극정성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웃으면서 내 몫까지 기도해달라고 사양했지만, 그렇게 새벽기도도 하면서 또 불교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오전에는 절에 설거지 및 기타 봉사까지 다니는 엄마였다.

자식에 대한 기도가 그렇게 봉사 또 봉사로 이어지는 사람이었다. 자식을 위해서 봉양을 열심히 하면 자식이 잘될 거라고, 복이 온다고 믿은 엄마여서 나중에 대학 시험을 앞두고는 부처님까지 봉헌했다고 말해서 혀를 내둘렀다.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엄마여서 나는 진심으로 존경했다. 자식이 좀 잘한다고 교만스럽거나 다른 엄마들을 왕따 시키고 혼자 잘할 거라고 욕심을 부리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하면서 함께 잘해보자고 기도하고 설악산 대청봉의 암자까지도 발톱이 까지면서 자식을 위한 기도를 위해 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 엄마가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면 언제나 지혜가 넘쳤다. 한마디 한마디가 누구나 새겨들어도 좋은 말만 했다.

한 번은 연락이 안 되어서 어디를 다녀왔냐고 하니, 스트레스가 쌓이면 차를 몰고 대구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실컷 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차 안이 제 노래방이예요." 라고 웃었다.


아침에 강남에서 출발하면 아이가 학교를 마칠 무렵에 데리러 갈 수 있다면서.  한 번그렇게 하고 오면 다시 힘이 솟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아이를 가진 엄마도 스트레스는 있고 또 그걸 스스로 극복하면서 푸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나 자식에게 그 스트레스를 떠 넘기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힘이 있으니 아이한테도 언제나 믿고 참고 기다려주곤 했다. 성적이 조금 잘못 나왔다고 아이를 나무라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요. 실수할 수도 있지요, 가 그 엄마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공부의 바탕은 국어였지만 거기에 다른 게 더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대학교 3학년이어서 당시 재경직은 12명만 뽑을 때였는데,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는지 참 궁금했다.

그 엄마가 밥을 꼭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한 바로는, 국어를 너무 잘 배워서 그게 대학 갈 때보다 행정고시 공부를 할 때 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엄마의 말을 요약하면,


따로 언어 공부를 하러 학원을 안 다녔다. 인강조차 들을 필요가 없다고 안 들었다. 그런데도 늘 높은 점수가 나온 것은 국어를 선생님한테 너무 잘 배워서 그렇다고 아이가 말했다는 것이다. 국어공부를 열심히 배운 것이 그렇게 쓰일 줄 몰랐다는 것이다.  


2차 논술에서는 글쓰기 훈련을 선생님이 너무 잘해주어서 걱정을 해본 적도 없고 글쓰기를 따로 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시 2차 논술은 글솜씨도 필요하지만, 글씨도 아주 깨끗이 예쁘게 써야 하는데 연필로 쓰는 연습을 오래 한 덕이라는 것이다.


그 엄마는 그래서 나한테 밥을 꼭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하지만 그게 다가 아닐 것을 나는 알았다. 그 아이는 원래 글을 잘 썼다. 대모산 백일장에서도 장원을 했었다. 잘하는 아이는 부모가 조금 더 신경 써주고 받쳐주면 더 잘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오래 가르쳤으니 국어를 당연히 잘한 건 알고 있으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른 노하우가 중요했다.

어떻게 학교 다니면서 그 힘든 공부를 했냐고 하니, 첫 번째 행시가볍게 생각하고 학교를 휴학하지 않고 시험을 보았는데 안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해는 휴학을 하고, 스터디 그룹을 하면서 공부를 하니 바로 붙었다는 것이다. 그건 필수라고 했다.


이 말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나는 반복해서 암기했다.  

휴학과 스터디그룹은 필수!


그때 나도 세 아이 중에 누구든지 행정고시를 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득달같이 그 엄마를 만나러 갔고, 노하우를 잊지 않도록 새겼다.

그리고 아들이 행시 공부를 할 때 이 두 가지는 절대 잊지 않고 계속 주입시켰다. 휴학과 스터디그룹.


물론 아들이 국어는 잘했다. 당시 수능이 불수능이었을 때인데 강남의 고등학교였지만 재학생 중에서 1등급이 단 2명이 나왔는데, 그중 한 명이 아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연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된 아이였다.

그러니 국어 잘하기는 크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머지 휴학과 스터디는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도 군대 다녀와서 휴학도 안 하고 행시를 시작했는데 당연히 안되었다. 그때 내가 휴학을 해야 하는데라고 말했지만 군대를 다녀오니 서울대 휴학 기준이 3학기 휴학에서 1학기만 휴학으로 변경된 바람에 휴학을 할 수도 없었다. 학교 공부와 행시를 병행하는 건 절대 무리였다.


그다음에는 휴학하고 스터디그룹을 짜고 공부를 한 순간 아들은 바로 붙었다. 나도 계속 휴학과 스터디그룹에 관한 말을 지속적으로 했다. 아들도 다행히 다른 사람의 말들 중에서 가장 좋을 것으로 취사선택해서 판단하는 아이라서 제 고집대로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혜롭고 겸손한 엄마의 성공법



살아가다 보면 정말 행복한 일이 많다. 특히 가르치는 아이들 때문에 생기는 일은 어떤 삶의 가치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 보다도 그 아이를 기른 훌륭한 어머니들을 많이 만나서 배우게 되는 점은 더 값지다. 

자식들이 성공한 엄마들이나 공부를 잘하는 엄마들을 만나서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 노하우가 다 자기 자식에게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방법을 차선책으로 두거나, 혹은 어떻게든 관련지어보려고 노력은 한다.


잘하는 아이를 둔 부모를 만나면 열심히 듣고 어떤 분은 메모하려고 수첩까지 들고 대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어떻게 하면 잘할지 연구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 '내가 공부할 때는' '나는 이랬는데' 란 말은 안 한다. 옛날 방식에만 자식을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변모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그 아이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겠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아이는 중학교를 수석 졸업한 바람에 원하는 일반 고등학교의 지망에 전부 탈락했다. 최상위 성적의 아이는 마음대로 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없다. 듣기로는 골고루 학교에 배정되는 것으로 암암리에 알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던 양재에 있는 여고로 배정받았다. 학교를 자퇴할 거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던 아이를 그 엄마와 내가 참 열심히 설득하고 그래도 마침내 개학이 되니 어쩔 수 없이 그 학교를 다니더니 서울대 경영과를 들어갔고, 대학 3학년에 재경직 행시에 붙었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 양재에 있는 여고에, 또 내 큰딸도 지망 고교로 당연히 쓰지도 않았는데 가게 되었다. 최상위 성적의 아이들은 그래서 강남에서 살 때 불리한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학년은 다르지만 그 아이와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러 운전을 하고 가면 아침에 양재대로에서 그 엄마를 만나 손을 흔들기 일쑤였다. 그 엄마는 운전을 워낙 잘해서 같이 출발해도 어느새 보이지 않고, 내가 벌벌거리고 가고 있으면 벌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씩씩하면서도 겸손하고 자식을 위한 지극정성인 엄마니 당연히 잘될 수밖에 없었다. 그 엄마가 언젠가는 나를 끌고 시험운을 잘 보는 도사님도 있다면서 또 새벽부터 분당까지 끌고 가기도 했으니, 그 엄마와 나의 재미있고 이상한 인연은 행시까지 온 셈이다.


그동안 쭉 유일하게 부러워했던 유일한 엄마였다. 어떤 엄마도 부러워해본 적이 없던 내가 유일하게 부러웠던 엄마. 그건 착한 아이와 정성 가득한 엄마에 대한 부러움이 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좀 오래 후이긴 하지만 아들의 행시 합격의 어느 부분은 그 엄마의 노하우도 들어있는 셈이다.


하여간 그날 나는 멋진 일식집에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았고 그 엄마의 노하우까지 공짜로 전수받아 와서 잘 사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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