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고요한 설산의 품으로

부제 : 안나푸르나, 다라파니에서 차메 까지 길 위의 하루

by 글다뮤

트레킹 5일차의 시작이다.


하루를 버티는 힘은 결국 ‘식사’에서 나온다.

다행히 네팔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평소 소식하는 나이지만, 이곳에서는 든든히 먹어야 했다.

맛의 문제보다 중요한 건 ‘체력의 지속’이었다.

잘먹고 그날 그날의 컨대션을 스스로가 잘 조절 할 수 있어야 이 길 위에서 하루의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 낼 수가 있다.

이날 아침은 디저트까지 제공이 되는 호사를 누렸다. 와우 애플파이라니! 그 달달함이 에너지를 한껏 채워준다. 기분 좋게 또 하루의 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오늘은 다라파니(Dharapani) → 다나큐(Danakyu) → 티망(Timang) → 차메(Chame 약 2,670m)까지의 구간을 걷게 된다. 이 길은 안나푸르나 회로(Annapurna Circuit)의 중간 전환 구간 중 하나이고, 앞선 코스에 비해 경치 변화도 크고 고도 변화도 꽤 있는 하루 이동 코스이다. 대략 15~16km를 걷게 된다.


설산의 첫 인사, 겨울 왕국의 통로


드디어 본격적인 눈길 트레킹의 시작이다. 다라파니길은 마르샹디 강을 따라 걷다가 점차 숲길로 접어드는 구간이다. 다라파니를 벗어나자 눈 덮인 봉우리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1월의 이 길은 마치 ‘겨울 왕국의 통로’ 같았다. 길 양옆의 소나무 가지마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하는 눈의 감촉이 들린다.

길 위의 공기마저 하얗게 얼어붙은 듯 걷는 동안 모든 것이 고요했다.

다라파니를 지나면 산 아래 눈이 얇게 깔려 지고 다나큐를 오르는 구간이 시작된다. 이길은 짧지만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겨울엔 얼음이 굳은 돌계단 위에 눈이 덮여 미끄러운 길이다.

왼쪽으로는 절벽과 오른쪽으로는 숲이 이어지는 구간이라 많은 트레커들이 “하루 중 가장 숨이 찼던 구간”이라고 회상하는 곳이기도 하다.


때때로 눈이 무릎 아래까지 차오르기도 한다.

숨은 점점 가빠지고, 바람은 차갑고, 하얀 설산은 가까이 있지만 마치 손 닿지 않는 신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은 멀건만, 발에는 어느새 물집이 서너 군데나 잡혀 버렸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순간이 오히려 조금 더 단단한 나를 ‘지금 여기’로 붙잡았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나는 지금,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생각을 멈추자, 고통은 사라지고 오히려 평온함이 찾아왔다.

몸이 앞서고, 마음이 따라왔다.

그 순간, 나는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존재하는 나’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토롱라 패스까지 무사히 끝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나는 진짜 나와 만나고 싶다.”


그렇게 나는 한 발 한 발이 욱신한 고통이 아니라 ‘다음 발을 디디는 것’만이 목표가 되는 길이었고 그런 내 의지의 발자국이 남겨진 길이 되었을 것이다.


티망에서 차메를 향한 숲길의 침묵


티망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또 길을 나섰다.

티망을 지나면 길은 한결 평탄해지지만 대신 한층 더 깊은 겨울의 침묵이 감도는 듯 했다.

인간의 목소리보다 바람과 눈이 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곳이 된다.

깊은 침엽수림은 겨울의 숨결로 차가웠지만, 햇살은 부드럽게 나를 감쌌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 때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숲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건 아마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 목소리를 품은 채, 나는 다시 걸었다.

그리고 멀리서 차메의 불빛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차메의 불빛


겨울 해가 저물고, 드디어 차메의 불빛이 눈앞에 다가왔다.

작은 롯지 안, 난로 옆에 둘러앉은 트레커들.

이곳에서 여러 국적의 여행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중국에서 세르파와 함께 길을 걷는 중년의 여성 한분,

가이드도 세르파도 없이 오롯이 혼자 걷는 미국 청년,

그리고 친구 셋이 함께 온 인도 청년들.

각자의 사연은 달랐지만,

그날 우리는 하나의 불빛 아래에 있었다.

젖은 양말을 말리고,

차가운 손을 난로 불빛에 녹이며

우리는 말없이 웃었다.

언어는 달랐지만,

따뜻한 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 말없이 건네는 미소만으로도 서로의 수고로움을 다독여 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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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_164203(차메 포텔라 숙소).jpg

그날 저녁,

한국말을 놀랍도록 유창하게 하는 사장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버섯 누들을 내어주셨다.

추위에 떤 몸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슬쩍 건네주신 태양초 고추장!

그 칼칼한 매운맛이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 뜨끈한 한 그릇이 온 세상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나를 견디는 힘

겨울의 안나푸르나는 내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길이었다.

“Amor Fati —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한다.”

니체의 말처럼,

고통은 나를 부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단련시켰다.

설산을 걷는 동안 나는 배웠다.

몸은 나를 견디고,

마음은 고통 속에서 자유를 배운다는 것을.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내 인생에도 ‘차메의 불빛’ 같은 순간이 있었나요?

지쳐 쓰러질 것 같던 하루 끝,

누군가의 미소 하나가 다시 걷게 한 적은 없었나요?

나를 견디는 힘,

그것은 결국 어디에서 오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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