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나의 한계와 마주하다

부제 : 안나푸르나, 차메에서 어퍼피상 까지 길 위의 하루

by 글다뮤

6일차, 드디어 3,000m 고지에 돌입하는 날이다.

차메(2,670m)를 출발해 브라탕을 지나 두쿠르포카라(3,060m)에 이르고,

오늘의 목표는 어퍼피상(3,250m)이다.


나와 함께 걷는 길동무 C는

평소 운동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산행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눈 위를 걸을 때의 속도와 체력 안배는

확실히 경험이 만들어낸 여유가 있었다.


나는 국내 명산들을 제법 걸었지만,

이번 안나푸르나의 설산길은 스케일이 달랐다.

숨이 가빠오고, 발걸음마다 무게가 느껴졌다.

그때 산이 내게 속삭였다.

“이제, 네 한계와 마주할 시간이다.”


서로 다른 리듬, 나만의 속도

길동무 C와 나는 서로의 다른 속도를 인정했다.

함께 하는 여정이지만,

각자의 리듬으로 걷기로 했다.


앞서가는 이의 발걸음을 따라가기보다

내 속도에 맞게 걷기로 하자 다짐했다.

혼자 걷는 길이 오히려 나만의 사색으로 채워졌다.

나는 걷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는 것.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고,

마음의 빈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길을 걷는 나의 목표였다.


무너짐의 순간


하지만 오늘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발바닥과 발가락 곳곳에 생긴 물집이

걸음을 옥죄기 시작했다.

한계는 체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숨이 가빠지고,

마음속에는 미세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몸이 따라주지 않자 조바심이 일었다.

“혹시 너무 뒤처지는 건 아닐까?”

불안이 마음을 휘저었다.


결국 나는 나만의 리듬을 잃고

앞사람의 속도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은 완전히 무너졌다.


결국 눈밭 위에 주저앉아

웅장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 나.

배낭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감정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하얀 눈밭 위에서 서럽게 울었다.


눈물은 금세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이거, 누가 억지로 시켰냐?”

“너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잖아.”

“왜 또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니?”

“그냥 너만의 속도로, 천천히 가도 괜찮잖아.”


그건 누가 한 말도 아니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건네는 목소리였다.


다시 일어서며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내 발걸음이 원하는 만큼만 걸어가자.”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일어섰다.


길 위에서 나만의 템포로

춤추듯 걸어가기로 했다.

그때부터 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호흡과 심장의 박자에 맞춰 걷다 보니

중간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뒤처진 나를 향해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길잡이와 셀파들. 그리고 나의 길동무

가이드 파상은 따뜻한 물 한 병을 내밀며 말했다.

“힘들어? 이거 마시고 힘내”

어눌한 한국어였지만,

그 속의 따뜻함이 내 몸을 녹여주었다.


자연이 가르쳐준 겸손

두쿠르포카라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

점심을 먹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오늘의 마지막 목표, 어퍼피상을 향해 다시 걸었다.

눈 때문에 거리는 짧아도

시간은 두 배로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풍경과 마주했다.


거대한 안나푸르나의 4봉우리,

구름의 흐름, 파란 하늘,

그리고 멀리서 일어나는 눈사태의 장관.

순간,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내 존재는 한없이 미약해졌다.

하지만 그 미약함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진실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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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경이로움, 그리고 살아있음.


“사람은 자연 앞에서 작아질 때,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날, 나는

‘한계를 견디는 나’ 속에서

‘자연에 귀 기울이는 나’를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걷는다는 건

단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리듬을 잃은 적이 있나요?


지금 당신의 걸음은

누구를 향해 걷고 있나요?


고통스럽던 경험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건 어떤 일이었나요?


‘나만의 속도’로 산다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지금,

너무 앞서가려는 자신에게

“괜찮아, 조금 느려도 돼”

라고 말해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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