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길 위의 생생한 나, 그리고 선물 같은 순간들

부제 : 안나푸르나, 어퍼피상(3250m)에서 마낭(3400m)까지

by 글다뮤

어퍼피상을 떠난 아침,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훔데를 향해 걸었다. 겨울의 트레킹 길은 사람이 거의 없어 자연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화장실이 없어도 불편할 틈 없이,

주변을 한번 쓱 살펴보고는

정말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의 생리현상을 해결하며

그 모든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마치 인간이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은

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20200106_092345(어퍼피상에서 훔데로).jpg
20200106_123145(훔데가는 길..).jpg



훔데에서 만난 ‘인생 달밧’


훔데에 들어서자 작은 티하우스에서 달밧을 주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네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날의 달밧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따뜻한 밥, 렌틸콩 수프, 살짝 매콤했던 카레,

피곤했던 몸에 스며들던 그 따뜻함과 든든함 —

그 한 끼가 마치 내 몸과 마음을 동시에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네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한 순간이기도 했다.


훔데를 지나 마낭으로 향하는 길,

안나푸르나 3봉이 눈앞으로 거대하게 다가왔다.

하얀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아래 서 있는 내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그 장면을 배경 삼아 인생샷을 찍었는데

카메라를 보기도 전에 먼저 눈물이 핑 돌았다.

20200106_144555(마낭가는길).jpg
20200106_142845(안나3봉배경).jpg

“내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자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이 대자연 속에서 한 인간으로 서 있다는 기적을

미묘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느낀 순간.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러나 그 작은 존재가 이렇게 감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


걷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치듯 오갔지만

나는 그 순간의 걸음 하나하나에 집중해보려고 했다.

“이 걸음은 지금만 존재한다.”

그 마음으로 걷는 트레킹은 정말 특별했다.


뭉지에서 만난 양 떼와 ‘포스 넘치는 리더 양’


뭉지에 도착해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양 떼들이 마을을 가득 채우며 움직였다.

그중에서도 리더 숫양이 있었는데

진짜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깨를 쫙 펴고,

뒤를 따르는 양들을 이끄는 모습이

어찌나 위풍당당하던지

홍차를 마시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런 예상치 못한 작은 순간들이

여행을 한층 더 살아 있게 만들어주었다.

20200106_153438(뭉지도착).jpg

마낭에서 씻어낸 일주일의 먼지


마낭 숙소에 도착한 후,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보는데

며칠 동안 물도 제대로 닿지 않았던 피부가

말 그대로 ‘산이 품은 얼굴’이었다.

흐르는 물로 얼굴과 손을 씻었을 때

그 상쾌함이라니.

물 한 컵, 물 한 번의 세수조차

얼마나 소중한지 전신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흘렀구나.”

그만큼 그 시간들은 깊고 진하게 살아 있는 시간들로 가득 채워있었다.


마낭의 또 다른 인연 — ‘모델급’ 네팔 청년


그날 저녁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안내해 주는 청년을 보고 우리 모두는 그의 모델 포스에 감탄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저 친구는 유럽에서 온 모델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조각 같은 외모의 네팔 청년이었다.

심지어 함께 걷던 네팔 세르파들조차

“정말 네팔 사람 맞아?” 하고 웃으며 물어볼 만큼

기존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높은 콧대, 선명한 이목구비, 차분하고 부드러운 미소까지.

마낭에서 마주한 풍경들이 멋졌던 것처럼

사람 또한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또 하나의 풍경이 되어 주었다.



마낭에서의 하루 그리고 강가푸르나까지 함께 걸어준 작은 안내견


마낭에서 하루 머물며 고소 적응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강가푸르나 빙하 전망대를 향해 걷으며 몸을 풀어보기로 한다.

20200107_101716.jpg

아침을 먹고 한참 길을 걷다 보니

슬그머니 우리 앞으로 작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겉모습은 유기견 같기도, 길들여진 마을개 같기도 했지만

그 눈빛은 묘하게 또렷하고 영리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그 아이는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우리의 속도에 맞춰, 앞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르막이 가팔라질수록

그 작은 다리는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리가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추면

그는 조금 앞에서 먼 산을 바라보듯 앉아 있다가

우리가 가까워지면 다시 벌떡 일어나

“이제 가자!” 하는 듯한 걸음으로 길을 이끌었다.

말 한마디 없지만

그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이 길이 훨씬 든든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강가푸르나 빙하는 새하얀 숨결로 눈 덮인 호수를 비추는 듯했다.

그 풍경 속을 향해 꼬리를 살랑이며 서 있는 그 강아지가

왠지 이 길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놀랍게도 우리 뒤에서 따라오며

마치 “안전하게 내려가고 있는지” 지켜보듯

조용히 발걸음을 맞춰 주었다.

위태로운 돌길을 지날 때면

몇 미터 뒤에서 계속 보이콧하듯 따라오다가

안전한 길에 접어들면 쓱 앞으로 가서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가 보이던 순간,

그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어느 골목으로 휙 뛰어가 버렸다.

정말 산의 작은 수호신 같았다.

20200107_100549(강가푸르나에서 만난 안내견).jpg
20200107_103251.jpg

다음날,

마낭 마을과 작별을 고하며 길을 나섰다. 조금 걷다보니

눈앞으로 익숙한 꼬리 하나가 살랑거리며 나타났다.

그 아이였다.

하지만 체격 좋은 주인의 발아래에서

천천히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잘 있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식사 중에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작은 존재가 아마도 전생에 거대한 산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 영리함과 여유로움이 괜히 나온 게 아닐것이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나의 안나푸르나가 되다.

20200107_104244 마낭 강가푸르나 트레킹.jpg
20200106_161013(마낭가는길).jpg

어퍼피상에서 마낭까지 걸어온 날, 그리고 마낭에서의 하루는

그저 트레킹 일정의 일부가 아니라

따뜻한 음식과 사람, 동물, 자연이 모두 이어진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되어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양 떼가 흘러가던 고요한 뭉지의 길,

홍차 향과 함께 쉬어갔던 순간,

얼굴과 손을 씻으며 느낀 물의 소중함.

그리고 숙소에서 만난, 모델처럼 생긴 청년의 미소

늘 묵묵히 우리의 걸음을 배려하며 도움을 주는 세르파와 가이드님

잊지 못할 강가푸르나의 길을 이끌어 준 작은 안내견까지


걷는다는 것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이렇게 예상치 못한 선물들을 품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자연이 건네준 크고 작은 선물들의 총합이 아니었을까?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1.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자연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었는가?

작아지는 나, 겸손해지는 나, 더 단단해지는 나, 어떤 나였는지.


2. 지금의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살아가는 것과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다르다.


3.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가족, 사람, 풍경, 혹은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