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안나푸르나, 야크카르카(4018m)를 향해
마낭을 떠난 아침, 길은 평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평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흔적조차 남김없이 감춰져 있었다.
숙소에서 만났던 트레커들이 되돌아오며 말했다.
“길이 없어졌어요. 그냥… 없어졌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치 누군가 내 앞에 놓인 지도 전체를
하얀 눈으로 덮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길잡이 파상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아는 길이 있어요. 뚫고 가면 됩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흔들리던 마음을 붙잡아 주었다.
가이드 없이 걷던 트레커들도 자연스럽게 우리 뒤에 합류했다.
우리는 하나의 작은 무리가 되어
눈 속으로 사라진 길을 찾아 함께 나섰다.
사라진 길, 사라지는 체력, 그리고 또 하나의 눈물
고도는 서서히 높아졌고,
눈은 허벅지까지 쌓인 곳도 있었다.
함께 걷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부담이 되어
자꾸만 타인의 속도에 맞춰야 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얕아지고
다리는 자꾸만 뒤처졌다.
그리고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끓고 있던 감정이
눈 속에서 터져버렸다.
짜증, 피로, 불안, 열등감,
그리고 한없이 약해지는 나.
나는 또 한 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왜 자꾸 흔들릴까.”
그 순간의 나는 너무 작고 미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질문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렇게 약한 나도… 그냥 인정해도 괜찮지 않을까?”
울음이 그치고
숨이 잦아든 뒤,
나는 다시 다짐했다.
지금 이 걸음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걸음이 되도록 하자.
다른 누구의 속도가 아닌
오직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리듬감을 가지고 걸어가자.
또 한 번 더 나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내가 나를 조금은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격려해 본다.
그 순간부터 풍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들리고 산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발걸음은 여전히 천천히 걷는 걸음이지만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야크 무리와 함께 걷는 ‘나만의 동화 같은 길’
야크카르카가 가까워질 즈음 나는 일행과는 한참 떨어져 걷다 보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다.
드문드문 바람소리와 내 거친 호흡 소리와 눈 위를 짚고 걷는 스틱의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커다란 야크 무리 한 떼가 조용히 나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홀로 걷는 중이었고 처음 보게 된 그 거대한 덩치가 무섭기까지 했다.
“혹시 이 많은 야크들이 나에게 돌진하면 어떡하지…”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냥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블랙 야크가 딱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 블랙 야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야크의 검은 눈동자는
생각보다 너무도 선하고 깊었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괜찮다.
네가 멈추면,
우리도 이렇게 멈춰 쉴 수 있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시 따라왔다.
내가 멈추면 그들도 멈추고
내가 걷기 시작하면 그들도 걸었다.
말도, 소리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같은 리듬으로 걷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타나자
야크 무리는 위쪽 길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작별을 건넸다.
그 짧은 동행은
그 길 전체에서 내가 혼자였던 순간들을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 조용한 힘을 남겨주었다.
도착, 그리고 다정한 블랙티 한 잔
야크카르카의 숙소가 보일 즈음
눈발은 잦아들고 해는 산 뒤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누군가 검은 찻잔을 흔들며 다가왔다.
파상이었다.
그는 블랙티 한 잔을 건네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 길… 정말 힘들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온기가 손끝을 타고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
폭설로 사라진 길에서 시작해
눈물과 두려움,
야크와의 동행까지 지나
마침내 다다른 이 고산의 작은 마을에서
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정말 깊이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우리는
깊이 쌓인 눈 때문에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그 결정조차
이제는 나에게 고요하고 감사한 여유였다.
오늘의 나는, 조금 더 나다운 나였다
폭설도, 눈물도,
야크의 발걸음도,
파상의 블랙티도.
모든 것이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준 하루였다.
이 길은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만난 나는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나다웠다.
나는 이 날,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1. 지금 나는 어떤 속도로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도는 진짜 내 속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속도에 끌려간 속도인가?
2. 약해진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는가?
비난하는가, 숨기는가, 아니면 그 약함마저 받아들이는가?
3. 길을 잃은 것 같은 순간, 나는 어떻게 나를 인도해 왔는가?
누군가의 말? 나의 선택? 아니면 잠시 멈춤?
4. 고독한 순간, 나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느끼는가?
작은 존재? 혹은 오히려 내 안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는 존재?
5. 오늘 내가 나를 위해 해준 가장 큰 격려는 무엇인가?
비난 대신 건넨 한마디의 다정함이 있었는가?
6. 내 삶의 야크들은 무엇이었을까?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며, 내가 멈추면 멈춰주고, 다시 걸으면 함께 걸어준 존재들.
7.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어떤 점에서 더 단단해졌을까?
그리고 어떤 점은 여전히 다정히 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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