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나를 위한 다정함으로, 그리고 동화 같은 순간들

부제 : 안나푸르나, 야크카르카(4018m)를 향해

by 글다뮤

마낭을 떠난 아침, 길은 평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평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흔적조차 남김없이 감춰져 있었다.


숙소에서 만났던 트레커들이 되돌아오며 말했다.

“길이 없어졌어요. 그냥… 없어졌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치 누군가 내 앞에 놓인 지도 전체를

하얀 눈으로 덮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길잡이 파상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아는 길이 있어요. 뚫고 가면 됩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흔들리던 마음을 붙잡아 주었다.


가이드 없이 걷던 트레커들도 자연스럽게 우리 뒤에 합류했다.

우리는 하나의 작은 무리가 되어

눈 속으로 사라진 길을 찾아 함께 나섰다.


20200108_115502(야크카르카 가는길).jpg
20200108_115512.jpg


사라진 길, 사라지는 체력, 그리고 또 하나의 눈물

고도는 서서히 높아졌고,

눈은 허벅지까지 쌓인 곳도 있었다.

함께 걷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부담이 되어

자꾸만 타인의 속도에 맞춰야 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얕아지고

다리는 자꾸만 뒤처졌다.

그리고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끓고 있던 감정이

눈 속에서 터져버렸다.


짜증, 피로, 불안, 열등감,

그리고 한없이 약해지는 나.


나는 또 한 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왜 자꾸 흔들릴까.”

그 순간의 나는 너무 작고 미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질문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렇게 약한 나도… 그냥 인정해도 괜찮지 않을까?”

울음이 그치고

숨이 잦아든 뒤,

나는 다시 다짐했다.

지금 이 걸음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걸음이 되도록 하자.

다른 누구의 속도가 아닌

오직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리듬감을 가지고 걸어가자.

또 한 번 더 나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내가 나를 조금은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격려해 본다.


그 순간부터 풍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들리고 산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발걸음은 여전히 천천히 걷는 걸음이지만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야크 무리와 함께 걷는 ‘나만의 동화 같은 길’


야크카르카가 가까워질 즈음 나는 일행과는 한참 떨어져 걷다 보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다.

드문드문 바람소리와 내 거친 호흡 소리와 눈 위를 짚고 걷는 스틱의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커다란 야크 무리 한 떼가 조용히 나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홀로 걷는 중이었고 처음 보게 된 그 거대한 덩치가 무섭기까지 했다.

“혹시 이 많은 야크들이 나에게 돌진하면 어떡하지…”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는 천천히 걷다가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냥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블랙 야크가 딱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 블랙 야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야크의 검은 눈동자는

생각보다 너무도 선하고 깊었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괜찮다.

네가 멈추면,

우리도 이렇게 멈춰 쉴 수 있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들은 다시 따라왔다.

내가 멈추면 그들도 멈추고

내가 걷기 시작하면 그들도 걸었다.

말도, 소리도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같은 리듬으로 걷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타나자

야크 무리는 위쪽 길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작별을 건넸다.


그 짧은 동행은

그 길 전체에서 내가 혼자였던 순간들을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에 조용한 힘을 남겨주었다.



도착, 그리고 다정한 블랙티 한 잔

야크카르카의 숙소가 보일 즈음

눈발은 잦아들고 해는 산 뒤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누군가 검은 찻잔을 흔들며 다가왔다.

파상이었다.


그는 블랙티 한 잔을 건네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 길… 정말 힘들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온기가 손끝을 타고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


폭설로 사라진 길에서 시작해

눈물과 두려움,

야크와의 동행까지 지나

마침내 다다른 이 고산의 작은 마을에서

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정말 깊이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우리는

깊이 쌓인 눈 때문에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그 결정조차

이제는 나에게 고요하고 감사한 여유였다.


오늘의 나는, 조금 더 나다운 나였다

폭설도, 눈물도,

야크의 발걸음도,

파상의 블랙티도.

모든 것이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준 하루였다.

이 길은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만난 나는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나다웠다.

나는 이 날,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1. 지금 나는 어떤 속도로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도는 진짜 내 속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속도에 끌려간 속도인가?


2. 약해진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는가?

비난하는가, 숨기는가, 아니면 그 약함마저 받아들이는가?


3. 길을 잃은 것 같은 순간, 나는 어떻게 나를 인도해 왔는가?

누군가의 말? 나의 선택? 아니면 잠시 멈춤?


4. 고독한 순간, 나는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느끼는가?

작은 존재? 혹은 오히려 내 안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는 존재?


5. 오늘 내가 나를 위해 해준 가장 큰 격려는 무엇인가?

비난 대신 건넨 한마디의 다정함이 있었는가?


6. 내 삶의 야크들은 무엇이었을까?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며, 내가 멈추면 멈춰주고, 다시 걸으면 함께 걸어준 존재들.


7.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어떤 점에서 더 단단해졌을까?

그리고 어떤 점은 여전히 다정히 품어야 할까?


# 안나푸르나 서킷 트레킹 # 50대 여성 도전 # 나다움을 향해 # 여행 에세이 # 생각 한 줌 #사유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