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적막의 길에서 만난 깊은 고독

부제 : 토롱패디(4,540m) 그리고 하이캠프(4,925m) 까지 고산

by 글다뮤



야크카르카에서 토롱패디로 가는 길은

내 몸에게, 내 마음에게, 그리고 내 호흡에게

조금은 가혹한 시험이 되기도 했다.


고도는 이미 4천 미터를 넘었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가슴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발끝은 단단하게 쌓여있는 눈을 더듬으며 한 발씩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딘 걸음이지만 최대한 내 몸에 집중하며 걸어야 하는 길이다.


정말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 일행이 아닌 다른 트레커들을 만난 적이 없다.

이 구간을 걷는 동안 나는 ‘사람들 속의 나’가 아닌

‘고요 속의 나’를 만났다.


나를 마주한 경험은

어떤 풍경보다도 더 깊이 남는다.

적막한 설원.

누구도 없는 길.

숨겨지지 않는 내 호흡.

그리고 나만의 리듬.

이 길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어떤 걸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묵묵하게 일깨워 준 여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이틀의 여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다시 흔들릴 때마다

이 고요한 고독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참 나답게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토롱패디에 도착했을 때

몸의 모든 근육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지금 멈추는 것이 내일을 위한 길이다.”


고산에서는 ‘걷는 용기’만큼

‘멈추는 용기’도 필요한 법이다.

나와 나의 길동무는 그날, 멈추기로 했다.

나의 몸과 마음, 그 모든 것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힘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 준 것이다.

토롱패디 도착

고산에서 맞이한 조용한 밤 — 회복의 온도


토롱패디의 밤은 길고, 깊고, 아주 조용했다.

밖에서는 바람이 산의 어둠을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바다의 숨결처럼 들렸다.


나는 따뜻한 블랙티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고요히 느끼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 느껴지는 차가움,

내려앉는 가슴의 묵직함,

빠르게 뛰는 심장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간.

그 어떤 풍경보다

내 몸이 회복되어 가는 그 감각이

이상하게도 고요하고 성스러웠다.


“내가 내 몸을 지켜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오늘만은 오롯이 ‘쉼’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다음날의 나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회복 후의 아침, 다시 걸어도 되겠다는 확신


다음날 아침,

토롱패디를 비추는 햇살은

밤새 내 몸을 차분히 다시 살려낸 것처럼 따스했다.

호흡이 훨씬 안정되고

몸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의 불안감 대신

이제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하이캠프를 향한 오르막길에 발을 올렸다.


토롱패디에서 하이캠프까지, 나의 호흡만 남는 길

하이캠프까지의 오르막은

안나푸르나 서킷에서 가장 집중해야 하는 길이다.

길은 험하지 않지만

고도가 모든 것을 느리게 만든다.

딱 10걸음을 걸으면 숨이 가빠지고

다시 멈춰 천천히 호흡을 고른 뒤

다시 10걸음을 내딛는다.

한 걸음과 한 걸음 사이,

그 짧은 순간 안에서

나는 내 존재를 가장 또렷하게 느꼈다.

한발, 숨, 한발, 숨.

온 세상이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져 있었다.

전날의 회복이

이 작은 오르막 하나하나를 버티는 힘이 되어주었다.


적막한 설원에서는

바람의 속삭임,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얼음 아래 작은 물줄기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 고요한 세상 속에서

나는 ‘나와 나’의 대화를 이어갔다.


“너는 이제 멈출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다시 걸을 수 있는 거야.”

멈춤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내 발걸음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하이캠프 도착, 내 안의 침묵이 나를 맞아주었다

지그재그 오르막을 몇 차례 넘어서자

하이캠프의 돌담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갑고

하늘은 숨 막히도록 푸르고

공기는 거의 투명에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 능선을 바라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

불안과 피로, 긴장과 고독이

모두 사라지는 듯한 투명한 감정.

마치 산이 말없이 내 등을 쓰다듬어주는 듯한 순간.

“잘 왔다.

너의 리듬으로 여기에 도착했구나.”

그 말이

바람에 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이캠프의 고요는

어떤 말도 필요 없는 평화였다.

나는 오늘의 걸음을

그리고 어제의 나를

조용히 안아주고 싶었다.

하이캠프



이틀의 여정이 내게 알려준 것

야크카르카에서 토롱패디로,

그리고 하룻밤의 회복을 지나

하이캠프에 닿기까지

이 이틀은

‘어떻게 걷는가’의 기록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의 기록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멈추는 것도 용기이고

회복은 결코 게으름이 아니며

나의 속도를 찾는 것이

결국 산을 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깨달음은

이 길이 끝난 뒤에도

오래오래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1. 지금 나는 어떤 속도로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도는 정말 내가 선택한 속도인가?


2. 나를 가장 많이 흔드는 건 무엇인가?

그 흔들림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3. 나는 언제 나의 ‘약함’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그 약함을 인정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4. 걸음을 멈춰야 할 때와 다시 걸어야 할 때를

나는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가?


5.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들을 나는 얼마나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억지로 밀고 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6. 적막한 순간, 나는 어떤 감정과 마주하게 되는가?

그 고요는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