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토롱라 패스, 바람을 넘어 나에게 닿은 순간

부제 : 하이캠프에서 토롱라 패스 (5416m) 정상까지 사유의 시간들

by 글다뮤

하이캠프의 새벽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는 기도의 시간처럼 깊었고,

긴 하루가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침묵이었다.

원래는 새벽 4시에 기상에서 5시에 이른 식사를 하고 일찍 출발하기로 했지만

식당 불이 켜진 건 6시가 가까워서였다.


고산의 아침은 언제나 사람의 계획보다 느리고,

더 신중하며, 더 자연의 리듬을 따른다.

예정보다 조금 늦게 출발하기로 한다.

따뜻한 식사로 몸을 데우고 마침내 길을 나섰다.


하얀 능선, 잔혹한 바람, 그리고 혼자가 되는 길


하이캠프를 벗어나자마자

길은 길게 펼쳐진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눈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는 곳도 있었고

온 세상이 흰빛으로 빛나며,

바람은 이미 이른 아침부터 얼굴을 후벼팠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한쪽 어깨에서 다른 쪽 어깨로

누군가 무겁게 몸을 눌러오는 듯했다.

바람 때문인지, 고도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내 걸음은 더욱 느려졌고

일행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멀어졌다.

다른 트레커들도 이날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하얀 설원,

희미한 발자국,

그리고 바람의 긴 호흡만이 내 곁을 지났다.

어떤 순간에는

여기가 이 세상인가, 저 세상인가

잠시 헷갈릴 만큼의 적막함이었다


바람은 잔혹했지만, 내 마음을 깨운 것도 바람이었다

나를 둘러싼 건 눈, 바람, 그리고 내 숨뿐이었다.

고도는 인간을 너무나 솔직하게 만든다.

숨이 조금만 거칠어져도

몸이 바로 항의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감정들이

고도와 함께 얇게 드러난다.


나는 그 길에서

내 약함도, 내 의지도, 내 두려움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마주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내 속도로.

내 리듬으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걸음으로.

토롱라 패스 직전 — ‘산이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순간’


토롱라 패스가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마치 마지막 시험이라도 남긴 듯

거칠고 모질게 몰아쳤다.

스틱을 짚는 손끝은 얼어갔고

눈발은 바람과 함께

얼굴을 스쳐 지나가다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바람은 힘을 키웠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누군가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상이었다.


토롱라 패스 거의 정상에서

나를 찾으러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배낭을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다시 에너지를 내어 본다.


‘토롱라 패스 도착입니다’ 울컥하는 순간


그 후로도

바람은 여전히 잔혹했고

호흡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조금씩 앞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깃발이 펄럭이는 돌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토롱라 패스 도착입니다.”

파상의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울컥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말해지지 않은 수많은 순간들이

내 안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폭설,

지독한 고독,

눈물,

야크의 눈빛,

내 속도의 인정,

멈춤의 용기,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의 모든 걸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고도 5,416m의 바람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까지 왔다.

그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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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넘은 것이 아니라, 나를 넘은 순간


토롱라 패스는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내 마음이 도착해야 할 자리였다.

나는 그곳에서 깨달았다.

걷는 것도 나,

멈추는 것도 나,

다시 길을 선택하는 것도 나,

그리고 끝까지 나를 이끈 것도

결국 ‘나’였다는 것을.


바람은 잔혹했지만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나를 발견했다.

나는 산을 넘은 것이 아니라,

산을 통해 나의 한계를 넘어갔다.


그날의 바람,

그날의 눈,

그날의 울컥함,

그날의 걸음들이

앞으로 살아갈 나에게

오래오래 조용한 힘이 될 것이다.


오늘 나는 하나의 산을 넘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산을 넘는 걸음처럼,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나 자신을 이끌고 있는가?”



[나다움을 향한 길 위에서 — 생각 한 줌]

1. 나는 지금 무엇을 ‘넘고’ 있는가?

산이 아닌, 마음의 산은 어떤 모습인가?


2. 약해진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비난하는가, 회피하는가, 아니면 다정하게 인정하는가?


3. 나를 끝까지 걸어가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

나의 의지? 희망? 동행? 자연?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


4.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에, 나는 기꺼이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5. 이 여정의 끝에서 나는 어떤 나로 남고 싶은가?

더 단단한 나? 더 부드러운 나? 더 나다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