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너와 나의 이야기
며칠 전 서랍 정리를 하던 중 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모서리에 깊숙이 박혀 잘 보이지도 않던 그 상자는 이미 지나버린 우리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나를 향한 그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를 참 잘 썼고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 그의 편지를 받아 읽어보던 날,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무척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외모, 말투, 다른 사람들을 향한 평소 언어 습관으로부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편지 속의 그는 섬세했고 감성적이었다. 이전에 내가 알던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그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종종 과격한 장난이나 틱틱거림으로 표현해서 '츤데레'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진솔하고 부드러운 표현보다는 말장난 드립과 거친 표현에 좀 더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편지로 본인의 마음과 생각을 들려주고, 좋은 시, 가사를 빼곡히 적어서 주니 놀라지 않을 수가...! 그렇기에 그의 편지는 더욱 감동이었고 고마움 그 자체였다.
"어쩜 이렇게 편지를 잘 써요? 반듯반듯한 글씨로 필기 잘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글도 잘 쓰네요!"
그는 이런 내 반응에 안도하는 듯 쑥스러운 듯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입꼬리가 어느새 씰룩씰룩하는 것을, 조금 더 으쓱으쓱해진 어깨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종종, 아니 꽤 자주 편지를 내게 건네 왔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해. 나한테도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너 때문에 내가 변해가는 걸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새로 알아가는 걸까?"
정확한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은 신기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꽤 뿌듯해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게 나로서도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우리가 더 이상 아무런 사이가 아닌 게 되었을 때, 이 편지들을 정리하는 건 나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사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괜찮아 보이는 얼굴로 덤덤한 말투로 괜찮다며 씩씩한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괜찮다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내가 '정말' 괜찮아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모아둔 그의 편지들은 한 상자에 다 몰아버렸다. 그리곤 잘 열어보지 않는 서랍 한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눈에 띠지 않게. 어쩌다 우연이라도 내 시선 끝에 편지들이 걸린다면, 혼자 속으로 외운 주문 '괜찮다. 오늘도 화이팅!'의 효력이 떨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정말 괜찮아진 이젠 잊고 있던 그 상자를 우연히 보고 열어볼 용기도 생겼다.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았던가..? 싶을 정도로 정말 상자 한가득이었다.
그 상자 속에 담긴 우리의 모습은, 특히 사랑에 빠진 그의 모습은 눈물나게 예뻤다. 편지지 선택부터 글씨 하나, 말 한마디에 들였을 그의 정성이, 그의 떨림이, 구구절절한 진심이 타임머신을 타고 여전히 나에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좋은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마음을 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그의 순간들이 이렇게나 많았음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문득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우리가 맞지 않는 이유들로 가득한 헤어짐을 정의하고 이해하려 했던, 지난 나의 모습이 편협하게 느껴졌다. 평소엔 잘 떠올리지 않던 이런저런 생각들이 참 많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엔 작은 반전이 일어났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종종 실망, 부정, 미움으로 채우기엔 우리는 나름 풋풋하고 행복했었다. 사랑이 넘치다 못해 손발이 없어질 만큼 오글거리기도 했지만, 그 마저도 귀여웠고 예뻤다. 더이상 '함께' 만들어갈 기억이 없기에 어떤 것보다도 이런 모습들이 소중하고 반짝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버린 기억들이 대책없이 미화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미웠던 감정도, 실망스러웠던 기억도,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조금 더 작게 묻어두고 싶다. 내 20대의 한 페이지를 함께 해준 사람으로, 예쁜 마음과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저 고마운 사람으로.
다행이었다. 어쩌면 진작 버렸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며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보지 않았을, 그 상자를 지금이라도 다시 열어보아서.
작가가 되고 첫 글을 올리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쓴 글을 '브런치'라는 오픈된 공간에 올리는 건 아직 참 어색한 일이지만,
오늘을 시작으로 조금씩 천천히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유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