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책, 눈물나는 땡초, 뜨거운 국밥
폭풍 같던 일들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니 여느 때 하곤 다르게 너무 많이 피곤해서 피곤이 풀릴 때까지 푹 좀 자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허리가 아프든, 머리가 아프든 잘만큼 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는 자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다. 굳이 시간 맞춰 일어날 일도 없고 누가 깨우는 것도 아닌데 아침 일찍 지독하게 피곤한 채로 깨어난다. 그게 싫어서 계속 누워있어 봐도 어설프게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니까 머리만 무거워졌다. 그래서 일어나 설치면 또 너무 피곤하고 몸이 안 좋은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좀 쉴래, 나 쉴 거야. 얘기하는 것도 어쩌면 제발 좀 그랬으면 하고 다짐을 하는 걸 지도 모르겠다.
3일째 근처의 커피숍에 갔다. 몇 년을 다니는 길인데도 가지 않는 커피숍인데 지나갈 때마다 매장은 큰데 늘 한가로운 분위기라 책 읽기 좋을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챙겨 나섰다. 얼마 전에 교보문고에서 산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에코백에 넣고 귀마개랑 마커, 수첩이랑 펜도 한 자루 챙기고 나섰다. 첫날은 옷을 너무 얇게 입고 갔는지 분명 온도는 낮지 않은데 어디선가 바람이 자꾸 느껴지는 게 가만히 앉아 있자니 너무 썰렁해서 한 시간도 안돼서 나와버렸다. 쳇. 이튿날에는 겨울옷을 입고 가서 괜찮았다. 역시나 사람들은 별로 없고 의자도 안락했고 쿠션도 있어서 책이 잘 읽어졌다. 무엇보다 교보 갈 때마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사지 않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이 민망하게도 이 책, 너무 재밌는 거다. 진작에 살 걸. 수필집 마음에 들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이거 참 맘에 든다. 편안한 곳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니 꾸역꾸역 누워 자는 것보다 훨씬 피곤함이 풀린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의 이슬아는 멋이 있는 사람 같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몇몇 일면을 보고 자유분방하다고,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 그녀는 아니라고 할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아무튼 이런 사람이라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소설가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최후까지 아껴두어야 한다고, 소설가가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쓸 게 없는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소설가가 아니면? 나는 이상하게 자신의 얘기를 하면 구구절절해진다. 뭔가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해서 이해시켜야 할 것만 같고 그러자니 변명이 되는 것만 같다. 나도 내 얘기를 잘 쓰고 싶다.
3시간을 앉아 책을 봤지만 손님이 별로 없어서 눈치가 안 보였다. 과연 유지는 되는 걸까 궁금하다. 이틀 째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면서 혼자서 웃다가 생각에 잠기다가 눈물이 글썽거렸다가 또 바로 소리 내며 웃어버렸다. 수필집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 수필집이란 너무 사색적이거나 너무 자의식 과잉이거나 또는 너무 쿨한 나머지 불편하거나 또는 너무 훈수적이라 읽고 나서 마음에 들기가 쉽지 않았는데 참 마음에 든다. 이슬아는 매달 구독자를 모집하여 구독료를 받는다. 그리고 주 5일 글을 써서 구독자들에게 메일로 보낸다고 한다. 이번 수필집도 2018년 글들을 모아서 직접 출판한 책이다. 그렇게 학자금 대출도 갚아나가고 그런단다. 이번 달은 모집이 끝난 것 같으니 다음 달부터는 구독해볼까 한다.
카페를 나서 국밥집에 갔다. 오랜만에 간 국밥집이라 소주가 당겼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소주 1병 마시고 집에 가서 떡실신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괜한 두통만 생길까 봐 참기로 한 거다. 국밥을 먹고 있는데 내 앞 테이블에 할아버지 네 분이 식사하고 계셨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대화가 들려왔다. 한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없는 어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흥분하셨다. "지가 뭐 대단한 줄 알아! 지 얘기밖에 안 해. 관심 못 받아서 지랄 환장인 할배탕구야." 그 의견에 전혀 이견이 없는지 다른 할아버지들도 모두 동의하시며 "관심 못 받으면 안 되는 인간이야"라고 결론을 내리셨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하고 생각해보니 나와 내 친구들 모습이었다. 관심 못 받아 안달 나 무리수를 두는 민폐 인간들에 대한 얘기를 하곤 하는데 아, 역시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민폐인 사람들은 늘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또 몹시 피곤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화제가 '건강'으로 넘어갔다. 알콜성 치매, 고혈압, 당뇨 등 건강에 대해 얘기하시다가 짜게 먹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소금을 전혀 먹지 않으면은 또 안돼. 하시더니 갑자기 일본에서 먹은 라멘이 너무 짜서 기절할 뻔하셨단다. 자신도 짜게 먹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도저히 못 먹게 짜서 힘들었다고. 휙휙 넘어가는 화제 전환을 보고 있으니 진짜 나와 내 친구들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있지만 마치 친구들이랑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할아버지는 N처럼 이야기하고, 한 할아버지는 B오빠처럼 이야기하고, 한 할아버지는 H처럼 이야기하더라. 그리고 한 할아버지는 나처럼 이야기하셨다.(거칠었다는 얘기지.) 늙어 저렇게 앉아 지금과 다름없이 수다 떨고 있을 우리를 생각해보았다. 그 와중에 먹은 땡초가 너무 매워 눈물, 콧물이 났다. 그래서 얼른 국물을 먹었지만.. 아, 국물까지 너무 뜨겁고 지랄이야.
남궁민 나오는 드라마 보고 자야지. 내일은 좀 늦게 일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