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구녕에 바람 넣고 온 이야기
"콧구녕에 바람 넣으러 가자!"
하고 친구J가 링크를 하나 떡 보내주길래 보니 아홉산 블로그 소개 페이지였다.
그렇게 J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근처의 '아홉산'이라는 곳에 다녀왔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대나무 숲이라고 한다. 멀지도 않아서 부담도 없었고 시원했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숲 안의 찬 기운이. 그리고 내 머리가.
우리가 간 날은 포근한 편이었지만 겨울이다 보니 사람은 많이 없어서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좋았다.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다시 보는 만큼 할 얘기는 많고 많았다. 가장 오래된 친구지만 나의 모든 시간을 붙어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전체를 보았을 때는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 친구겠다. 직장문제로, 사는 문제로 이렇게 저렇게 떨어졌다 붙었다 했는데 이번에 J는 부산에서 새 일자리를 구했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기분전환을 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있는 대나무들을 보며 '이게 단가?' 하며 기운이 빠졌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걷기에는 좋았다. 길도 잘 나 있었고 산책코스 정도로 다녀오기 좋았다. 자꾸만 뒤를 확인해야 했는데 음란마귀가 붙었는지 자꾸만 이야기가 19금으로 빠져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둘이 스타일도 진짜 다른데 어찌 이런 건 쿵작쿵작이 맞다 못해 증폭되는지 참....
<대호>, <협녀, 칼의 기억>, <군도>등의 영화 촬영 장소로 아홉산이 유명하다고 한다. 군데군데 어떤 대나무들은 색깔이나 무늬가 너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은 없고 날씨는 차갑고 축축하며, 대나무 너머로는 어둠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는 소름 돋는 느낌이 있었다. 너무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길래 "나도 좀 무서워." 하긴 했는데 말한 게 우습게도 갑자기 하는 말이, 자기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무서웠던 것 같다며 웃고 지랄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다."
J의 아버지는 지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J는 서서히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고, 또 그 부녀의 관계 자체가 워낙 그래서 그런지 무덤덤하게 얘기하긴 했는데 나도 많이 뵌 분이기도 해서 예전 기억에 많이 났다. J집에 갔을 때 끓여주신 꽁치김치찌개도 기억이 났고, 같이 갔던 해운대 바다도 생각이 났다. 몸이 아프신지는 2-3년 됐지만 찾아뵙지는 못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J의 말대로라면 그렇게나 여윈 분을 마주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도 일상생활이 가능하실 때 뵙고 오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홉산을 한 바퀴 돌고 입구 쪽에 있는 고택도 구경하라고 하시길래 들어가 보았다. 사람은 없었고 겨울의 고택은 너무 쓸쓸하고 차갑게 보였지만 마루에 앉아있다 보니 이런 것도 좋다 싶다. J와 마루에 앉아서 이런데서 하루 종일 책 읽고 싶다, 차 마시고 싶다, 고구마도 먹고 싶다 그런 얘기를 하다가 결국 또 19금으로 빠지는 바람에 우리는 어쩜 이런가 하며 어이없어했다. 이 고즈넉한 고택에서 이따위 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많이 넘어가고 있었다.
J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검색해서 근처에 먹을만한 곳이 뭐가 있을까 찾아보다가 '안동 보리밥'이라는 밥집을 찾았고 차를 타고 이동했다. 둘 다 첫끼였기 때문에 먹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높았기에 이 과정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강렬한 욕구와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목적의식에 따른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고 해야겠다. J랑은 식성도 비슷해서 항상 의견 일치가 쉬운데 둘 다 꼬막정식에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해운대점에만 있는 메뉴라고 해서 숯불고기 정식에 굴전을 추가해서 먹었다. 보리밥 비빔밥과, 알이 매우 큰 굴전, 된장찌개, 가자미구이, 들깨 버섯, 미역무침, 잡채 등 다양한 반찬들이 많이 나왔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같이 다니면서 몸무게 최고점을 찍었던 우리 아닌가. 둘 다 지금은 다시 많이 감소했지만 그래도 먹는 건 먹어지더라. J가 다시 내려오고 처음 밥을 먹던 며칠 전에 예전에 자주 먹었던 메뉴를 먹으면서 현저히 줄어든 양을 느끼며 입 맞춰서 "오, 대단한데." 했었다.
부른 배도 꺼트릴 겸 근처 괜찮은 곳 있으면 커피나 마시러 갈까 해서 근처 카페에 갔다. 그 카페는 낮에 가면 뷰가 좋았을 것 같은데 이미 밤이어서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드립 커피는 진하기만 하고 별로 맛이 없었다. 요즘 이든 오빠가 내려주는 커피맛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런가 영 맛이 없었다. 커피맛도 별로 모르는 내가, 커피 마시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된 내가 커피맛이 별로네 하고 있는걸 내 친구 N이 봤으면 또 "많이 컸다, 많이 컸어." 했을 텐데.
J랑 창밖을 쳐다보면서-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지만- 나란히 앉아 또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결혼 안 한 싱글의 여자 둘이서 하는 얘기란 게 일, 가족, 사람 이야기를 하며 한 바퀴 빙 돌다가 결국 남자 얘기, 결혼 얘기, 2세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결혼에 있어서는 나이가 어떻게 됐든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한다 라는 생각은 비슷하지만 J의 경우는 자신이 아이를 갖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남자에 대한이랄지, 결혼에 대한이랄지 아무튼 관계에 대한 기대가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좋은 사람이 생겨도 자신이 아이를 못 가질 확률이 크기 때문에 스스로가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나팔관에 문제가 있어서 가능성이 10퍼센트도 안된다는 진단을 받고 난 후로 그렇게 됐다고 한다. 나는 내 친구들 중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살고자 하는 친구들이 많고,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 아이 없이 살아가는 게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친구 N도 있어서 친구가 그렇게 까지 그 문제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했는데, 가능한데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문제와는 아무래도 같을 수가 없는 거겠지. 내가 2세에 대한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는 그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걸 여실히 느낀다고 했다. 같은 선상에서 이성에 대한 마음이나 생각이 다르다고. 언젠가 그런 문제와 상관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차라리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버린 후라 그런 문제를 논할 필요가 없을 때이면 좋겠다고 한다. 또는 이미 아이가 있는 돌싱이 나쁘지 않다고 얘기한다. 아무튼 그런 자신의 상황, 생각 때문에 스스로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자연히 깊은 관계가 되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보기에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런 문제가 자신에게 큰 문제이긴 하겠으나 결국 연애를 하면서 이미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일들을 많이 겪어본 친구라 자신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게 안타까웠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도 결국 상처는 상처다.
일, 가족, 돈, 사람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이성,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어릴 때부터 비슷한 이유로 속을 끓이며 살아온 J와 나는 이렇게 20년도 더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우습기도 하고 어쩌면 무섭기도 하다. 서로를 보면서 그래도 20년이나 더 살아왔네.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앞으로 얼마일지 모를 남은 인생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서로를 멀리하기도 하는 것 같다. 비슷하다는 것, 가끔은 그것이 깊은 공감으로 이어져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 내가 내 문제를 회피하고 싶을 때는 그럴 수 없으니까. 서로가 거울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마도 또 그렇게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다가 어느 순간에 또 만나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또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우리 모습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