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
* [ ] 안의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었으나 신문에 실린 그의 비평서를 보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파티에 초대한 사람들이 앞에선 좋은 말을 해주나 뒤에서 비평가가 했던 말과 같은 깊이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녀는 본인이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깊이를 알기 위해 서점에서 책도 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러가서 다른 분들에게 물어도 봤지만 '깊이'에 대해 깨우치지 못한다. 그녀는 점점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자기는 깊이가 없으니 작품을 더 이상 만들 수 없었고, 잘 수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걱정한다.
친구들은 결국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젊은 여인은 급속도록 영락했다. 그녀는 3만 마르크를 유산 받았는데 그것이 다 떨어지자 자신의 그림들을 전부 파손하고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 내렸다.
대중지들은 그녀의 자살 사건을 상세히 다루었다.
그녀는 왜 삶을 놓았을까?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그녀를 죽인 것은 아니다.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론가의 초기 평론은 그녀가 죽고 난 뒤 문예지에 기고한 ' 깊이에의 강요'란 표현을 씀으로써 철학이 없는 평론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젊은 여인이 처음 평론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 평론가에게 직접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의 수군거림뒤에 속으로만 삽질하거나, 서점에서 책으로 읽으며 빙빙 돌려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평론가에게 직접 물어봤다면?도움이 되는 대답을 들었으면 그녀는 발전할 수 있었을테고, 납득이 안되는 대답이면 무시하면 그만이지 않았을까.
파티에 그녀를 초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또 어떤가. 깊이 없다는 평론가의 의견을 자기 의견인냥 허세를 부리며 뒤에서 수군거린다.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유명하다는 남의 의견을 내 의견인냥 포장하며 허세를 부린 적이 나도 있다. 심지어 많았다. 그녀를 죽일 의도는 절대 없었을것이다. 그저 자신을 있어보이게 포장하기 바빴을 뿐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힘들어할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위기일 경우엔 우리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하고, 예술적인 고뇌엔 그녀 자신이 극복해야 한다고 내버려둔다. 심지어 물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았다. 친구가 힘들어할때, (그게 무슨이유이든) 곁에 있어주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적인 이유이든 빌어먹을 예술적인 감성이든, 내 친구가 잠도 못자고, 먹지도 않고, 작품도 하지 않고 뭔가 이상하다면 집에 찾아가서 그녀의 곁에서 등을 쓸어주거나, 손을 잡아주거나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게 친구다. 친구와 수다를 떨고 났으면 그녀는 '깊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거나 무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디어는 또 어떤가. 촉망받던 젊은 예술가가 3년간 피폐해지는 동안 어떤 관심도 없다가 가쉽거리만 찾아 벌떼처럼 달려든다.
이 단편에서 가장 따뜻했던 것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마음이었다. 그녀를 139미터 방송탑에서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져 으스러지지 않게 만들었다. 바람을 타고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가 전나무 숲속에 떨어져 죽게 만들어줬다. 어린 예술가를 보호하고싶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마음이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정말 짧은 단편이었는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있는척 '깊이도 없이' 떠들어 댄 평론가였고, 군중이었고, 친구를 외면한 친구였고, 예술은 모르고 가쉽만 찾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진실에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자기 학대만 일삼은 젊은 여인이었다.
이 단편을 읽기전의 나는 그랬다.
이제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