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는 셀프입니다.

by 뽀닥

<심산>

청마 유치환


심심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 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이 시의 산울림 영감은 바위에 앉아 이나 잡으며 홀로 살지만 전혀 궁상스럽지도, 불쌍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아 보인다. 나도 산울림 영감처럼 여유롭고 느긋하게 홀로 살 수 있을까.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말 그대로 쑥쑥~자라는 것이 보이는 생명이 없다 보니 일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시간이 그만큼 흘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늘어나는 흰머리와 얼굴의 잔주름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지만 외모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세월의 흐름을 잊고 살았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일견 무료한, 그런 나날들이었다. 아이의 부재에 외로움이나 서글픔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외로움과 서글픔은 '있다가 없어야' 느낄 수 있는 고급 감정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부러움'은 존재했지만 그 또한 매일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15년간 부부는 잘 살아왔다.

신혼부부가 15년이 지나니 중년부부가 되었다. 남일같던 노년의 삶이 어느새 코앞이다. 자식 없는 부부의 노년의 삶은 어떨까.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졌을 때, 무엇보다 둘이 아닌 한 명만 남았을 때의 노년을 상상하면 갑자기 가슴 한복판에 무거운 돌이 놓인 듯했다. '아이가 있어야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산다' 거나 '아이가 있어야 가정이 평화롭다'거나 하는 말에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을 수 있었으나 '아이가 있어야 노년이 외롭지않다'라는 말에는 머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그런 것일까. 힘 없고 분별력이 떨어졌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자식'은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한 존재인 것일까. 그런 든든함 없이 홀로 외로운 노후를 맞이 한다고 생각하니 스멀스멀 불안해졌다.

불안한 감정 뒤로 억울한 감정이 치솟았다. 아이를 원치 않은 게 아니었다. 원했으나 생기지 않은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에 외롭고 불안정한 노후가 내 책임이라니,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분통이 터졌다. 나에겐 노후를 든든하고 안정감 있게 만들어 줄 반듯하고, 효심 지극하고, 앞날 창창한 자식이 필요하다고!

울분을 터트리다 쓴웃음이 나왔다. 먹이고, 입히며 키우는 노력도 하지 않고 달달한 결과물만 바라는 도둑 심보를 내보인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노후보장연금정도로 취급한 나의 속된 마음과 '노후'라는 이름하에 '나의 삶'을 남의 손에 맡기려는 의존성이 부끄러웠다.

부끄럽지 않을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다. 뚜렷한 답도 없이 답답한 하루를 보낼 때 이 시를 만났다.


유치환님은 주체적으로 사는 삶의 유유자적함을 한껏 보여주신다. 심심산골에 산울림 영감은 바위에 앉아 이나 잡고 홀로 살고, 화자 역시 그렇다. 인간은 결국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더냐. 누가 누구에게 기대며 타인에게 부담을 준단 말인가. 슬그머니 자식에게 기대려 했던 양심이 한껏 찔렸다.

자립하자. 기본적인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스스로의 힘으로 준비해놓자. 자연의 모든 동물이 그러하듯 나 자신을 스스로 돌보자. 그렇게 홀로 살다 힘이 들 때면 그때그때 주변인들에게 폐를 끼치며 그럭저럭 살아보자. 어쩔 수 없다. 부족한 것을 서로 메꾸며 같이 살아가는 행위 또한 인간의 위대함 아니더냐. 어찌되었든 몇십년뒤의 미래엔 지금보다 더 좋을 것이라 믿는 사회보장제도가 있을 것이고, 연금이 있을 것이고, 더욱더 진화한 A.I로봇이 혈혈단신인 나의 너럭바위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 심심산골에 크고 든든한 바위가 있는 땅이라도 보러 다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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