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중한 친구이자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 빨강머리 앤
문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과거의 이들의 고민과 형상을 투영해 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에 발표된 여러 영미 고전 문학들은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비추는 조명이자 든든한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필자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1970-80년대 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노래의 주제인 『빨강머리 앤』이다. 주인공 앤 셜리는 고아로, 초록지붕 집에 입양되어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하게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본 책의 주인공 앤 셜리를 단순히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인생의 단계를 넘어 진정한 자아를 찾은 여주인공’으로만 정의하기에는 여러 차별성들이 있다.
첫째, 앤은 원래대로라면 매슈와 마릴라의 입양아가 될 수 없었다. 매슈와 마릴라는 나이가 들어 농장을 대신 도와줄 일꾼이 필요했기에 여자아이의 입양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앤의 밝은 성격과 남다른 상상력을 매슈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앤 셜리는 영원히 고아원에서 지냈을 수도 있다. 둘째, 앤은 보통 또래와는 다르게 남다른 상상력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아이다. 앤 셜리의 가장 큰 특징은 풍부한 상상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 그리고 타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끌어들이는 '친화력'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초기 앤 셜리에게 가장 자주 발견되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앤의 결정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마릴라의 지적에서 보듯, 앤 셜리는 ‘해야 할 일들’보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몽상과 상상으로 자신의 슬픔과 역경들을 잊고자 했기 때문이다. 앤의 이러한 특징은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종종 말썽을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자신을 홍당무라고 놀린 길버트 블라이드에게 행한 '석판 참교육'을 들 수 있다. 그만큼 앤 셜리에게 자신의 외모는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핸디캡(handicap)이고 주근깨와 빨강머리는 특별함이 아닌 '수치심'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앤의 이러한 특성은 성숙함과 더불어 점차 달라지게 된다. 주근깨와 빨강머리는 어느새 시간이 흘러 조금씩 없어지고, 적갈색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키가 크고 여드름이 적어지며 세상을 보는 눈이 이전보다 넓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11살에 초록지붕에 처음 온 앤이 17세가 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성숙함과 사려깊음을 통해 독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여러 일들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들, 예컨대 슬픔과 고통과 기쁨이 인생사에서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달라지도록 만드는지를 여러 가지 이로운 점을 통해 깨닫게 된다.
본 책은 필자에게 세 가지 면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첫째는 앤의 콤플렉스라 할 수 있는 ‘빨강머리’가 누구에게든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단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역경과 고난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이다. 결과로만 보면 과거 앤이 품었던 것과 같은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훗날 고백하는 앤의 말처럼 "대상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변함없는 포부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필자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은 누구나 그렇듯 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보통 자신의 단점 때문에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앤의 성장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해 온 독자는 이러한 단점 또한 언젠가는 극복을 할 수 있으며, 단점으로 인해 자신을 보다 더 자세하게 세밀히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반면교사’로서의 기능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어떤 책보다 유익하다. 셋째로, 이 시대의 성경과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해주었는지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고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을 빼놓을 수 없다. 『작은 아씨들』과 『빨강머리 앤』은 동일한 당대 여성의 지위와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열약했고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또한 용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대 여성에게 있어 소설은 다른 무엇보다도 여성 또한 사회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잘 대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한국식으로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예컨대 한국 전근대 시기 ‘백정’으로 대변되는 천민은 사람이 아닌 소유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러한 천민이 1923년으로 가면 ‘형평 운동’의 주체가 되어 신분제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고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절실히 보여준다. 이는 이후 조선 형평사가 창립되고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연대함으로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데 구심점을 이루게 된다. 더불어 1927년에는 ‘근우회’라는 신간회 자매 단체가 설립되어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일체 차별을 철폐하는 것에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17세기 후반 시작된 계몽주의 운동과 더불어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고 ‘신여성’과 ‘모던 보이’ 또는 ‘모던 걸’이라는 용어 또한 이를 입증해주고 있으니 근대 한국에서도 ‘수많은 앤 셜리’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무언가를 꿈꾸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구절을 마지막으로 본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하느님은 영(靈)이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세요. 존재하심에 있어 현명하시고 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공의하시고 선하시며 진리인 분이세요”1)
“하늘에 계신 자애로우신 아버지, ‘기쁨의 하얀 길’과 ‘반짝이는 호수’와 ‘보니’와 ‘눈의 여왕’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점은 정말로 더없이 감사드려요. 그리고 지금은 감사드릴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걸 말씀드릴게요.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서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테니,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제발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다음에 커서 예뻐지게 해 주세요. 하느님 아버지를 존경하는 앤 셜리 올림”2)
각주
1) Lucy Maud Montgomery, 박혜원 옮김, 『빨강머리 앤』, (서울: 더모던, 2019), 98.
2) 위의 책,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