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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나무 Oct 20. 2024

사람은 왜 누군가를 안고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얇디 얇은 눈물과 슬픔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홀로 고독히 살아간다. 그래서 야행성일까. 거의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밤이 그의 무대이자 최후의 보루다. 그는 밤에 모든 사활을 건다. 그러나 낮에는 이보다 더한 무법자가 있으니, 모든 새의 왕좌에 위치한 독수리가 그렇다. 독수리의 천적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무법자이자 먹이사슬의 맨 위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종은 어떨까.


 나는 전에 시골에서 황소개구리를 본 적이 있다. 외래종인 그 놈은 덩치도 식성도 엄청나다. 또한 독을 내뿜어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를 쉽사리 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리 너구리’라는 포유류가 있다. 황소개구리와 오리너구리는 아마 먼 친척뻘이라 해야 하나. 황소도 개구리도 아니며 오리도 너구리도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대표주자들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별반 다른 것은 아니여서 A도 B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맞음편에 있는 A’와 B’로도 규정할 수 없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합성어와 합성어가 만나 제3의 창조물을 이루는 것처럼 (A+A를 제외하고) A+B, A+C……Z까지 점과 점처럼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생물체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뿐이다. 마치 역과 역을 빠르게 지나가는 고속열차와 같다고 할까. 자유를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올빼미와 독수리, 황소개구리와 오리너구리는 하나의 도피처다. 그러나 갈망할 뿐 우리는 이들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갈망하지만 거의 항상 빗나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때문에 ‘노애’(怒哀)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 싫은데 어느새 ‘노애’(奴哀)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끌어안아 슬피 울고 있다. 노애가 되지 않으려면 대체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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