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12. 칠불암~통일전
볕이 언제 났는지 가뭇하다. 내내 흐렸지만 비는 많지 않았다. 오늘도 짙은 회색 하늘이 어둡다. 금방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데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서출지를 지나 마을 쪽으로 접어드는데 전깃줄에 새가 까맣게 앉았다. 어머나 세상에, 제비다! 어렸을 적에나 보았던 풍경이다. 도중에 내려 하늘을 올려다본다. 뻐꾸기 이미 떠난 것 같고 이제 제비들도 떠나려 소집이라도 한 걸까(실제로 제비들은 이동 전 모여서 날기 연습을 한다고 한다). 수십 마리가 넘는 제비들이 땅바닥에도 내려앉고 전선에도 올라앉고 벼 이삭 위로 낮게 날기도 한다. 이 순간 이곳에 제비가 많다는 사실이 무엇을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이 아직 희망이 있다 손 내미는 호의로 느껴진다. 제비들아, 남쪽나라 잘 다녀오렴. 조금 이른 듯한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뜬다.
촉촉하고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간다. 여리여리 꽃 같은 버섯이 보인다. 네이버가 주걱개망초로 알려준다. 일단 비웃음을 날려주고 다시 보니 과연 개망초 꽃을 닮았다. 주름진 하얀 갓이 동그랗게 펼쳐지고 중심은 노랗다. 여우꽃각시버섯이란다. 모처럼 꽃처럼 피어난 버섯과 색이 예쁜 버섯을 몇 개체 보았다.
축축한 숲을 땀을 조금 흘리며 오른다. 간혹 보이는 벚나무에서 낙엽이 진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것도 벚나무와 뽕나무뿐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가을은 올 것이므로 성급할 것은 없다. 이질풀 쥐손이풀 여뀌, 여름과 가을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이 있다. 흐린 날에도 빛을 품는 나팔꽃도 있다. 이들을 잊지 않으면 화려한 날에 피는 꽃의 환희 못지않은 기쁨을 이어갈 수 있다. 달개비는 쌍둥이 열매를 포엽 속에서 포시랍게 키우고 있다.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포근해 보인다. 계단 위에 떨어져 있는 뽕나무 잎사귀를 하나 집어 들고 칠불암 마당에 들어선다. 간곡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숙연하고 간절한 무엇이 전해져 나도 조용히 그의 기도에 더하여 합장한다.
바위에 올라 쉰다. 뽕나무 노란 잎을 바람에 날리며 흐린 하늘에 편지를 쓴다. 비를 기대했노라고, 한바탕 퍼부어대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그럼 실컷 웃었을 거라고. 잔뜩 비를 품은 구름이 갈라지고 토함산 쪽으로 햇살이 환해진다. 구름 아래로 어딘가에는 무지개가 지나는지 선명하진 않으나 일곱 색깔 빛들이 떠다닌다. 내게는 매미 오줌 같은 약한 빗방울 스쳐 지난다. 아무래도 비는 내리지 않을 모양이다. 금오봉 가는 능선으로 넘어간다. 애기며느리밥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것이다.
따개비를 생각나게 하는 개옻나무 열매와 어제 꽃 핀 것 같은데 벌써 열매 가득 단 붉나무와 그리고 소나무 아래 무리 지어 핀 애기며느리밥풀 꽃들과 능선의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날이 흐려 그런지 오늘따라 슬퍼 보이는 며느리밥풀 꽃은 기운이 하나도 없다. 꽃으로 피어서는 배고프지 않을 일인데 여러 날 해를 보지 못해서인 것 같다. 한낱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인데도 며느리밥풀 꽃을 보면 애틋하니 애초에 인간은 연민을 품고 태어나는 존재인 것 같다. 언제든 꺼내어 써야 하는 본성이랄까.
임도 한가운데에서 사마귀가 길을 가로막는다.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짝이지 않는 게 조각 같다. 어쩐지 나를 보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니 과연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다. 사마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찍는다. 눈동자가 나를 따라다닌다. 탐색을 고요히도 한다. 내가 졌다, 발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솔잎을 안고 누운 사마귀가 가로막는다. 진짜 죽은 척을 하는 건가, 했는데 이 녀석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한다. 내가 움직이면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본다. 우스워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다친 건 아닌지 걱정하다 그만두었다. 애벌레도 아니고 폴짝 뛰든가 날든가 하겠지. 돌아봐도 그 자리 그대로 있다.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선다는 당랑거철의 고사가 만들어진 이유를 알겠다. 고 녀석들 몇 천 년이 흘러도 참으로 한결같구나. 저런 행동 방식이 생존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무서운 사마귀도 상대가 너무 무서워 꼼짝 못 하는 게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진실은 무엇일까.
쥐깨풀 꽃밭이 임도 양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남방부전나비 남방노랑나비 줄점팔랑나비, 흔한 나비들이 노니는 길을 나비처럼 가볍게 걸어 내려간다.
밤송이 벌어져 밤이 툭 튀어나왔다. 산밤이라 알이 잘다. 속껍질까지 잘 발라진다. 고소한 맛이 들어 맛있게 먹었다. 올가을 첫맛이 고소하다.
양피지에 들러 하늘타리 열매를 찾다가 물가에 핀 흰꽃여뀌를 볼 수 있었다. 여뀌 꽃이 이렇게나 탐스럽다니, 과연 이름 값하는 꽃이다.
내가 못을 도는 사이에 왜가리 놀라 떠나고 백로 날아들어 연잎 위에 가뿐히 내려앉는다. 나비는 능소화 꽃을 떨군다. 가벼운 몸짓에 나는 감탄한다.
서출지에서는 기생여뀌를 다시 만났다. 너른 공터가 기생여뀌로 가득하다. 이 꽃도 이름 값한다. 아직 꽃망울 상태인데 활짝 피면 더욱 어여쁘겠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여뀌를 올가을에 벌써 두 종이나 만났다. 이렇게나 잦은 발걸음을 한 길에서도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다. 나의 눈은 어둡고 나의 발길은 한길만 맴돌았던 것 같다.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세상은 언제나 새로울 준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 걸음만 살짝 벗어나 볼까,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