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굵어지고

2025. 8. 29. 약수곡~용장

by 풀잎

나팔꽃 피었다. 파랑과 보라 그 어디 즈음의 색으로 아침을 푸르게 연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하는데 자연에는 파란색이 흔치 않다고 한다. 파란 하늘, 파랑새, 파란 수레국화, 청띠신선나비… 파랗지 않나? 이중 파란색 색소를 합성하는 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라 색소 파랑은 얼마 되지 않고, 대개는 빛의 산란과 반사 등을 이용한 구조색이란다. 그러니까 식물이나 동물 중에는 뛰어난 물리학자가 있어 물리적 진화를 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게으른 혹은 약삭빠른 자연이 만든 파랑의 구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비를 통해 구조색을 처음 알았는데 더 많은 자연에 구조색이 등장한다. 구조색이 자꾸 궁금해진다. 카멜레온도 구조색, 세상은 흥미진진하다.


용장 마을에서 약수골 쪽으로 간다. 아침 볕의 기세가 수그러들어 아홉 시가 다 되었는데도 그늘 없는 도로가를 걸을만하다. 벼 익는 냄새가 이러한가, 뭔가 큽큽한 냄새, 농약 냄새도 조금 섞인 것 같은 메슥거림, 알 수 없는데 이삭이 고개 숙인 논 근처에 가면 더욱 짙어진다.


길가 허름한 기와 아래 키를 한껏 키운 백일홍이 만발하다. 홀린 듯이 길을 건넜다. 들판에 서너 채 외로운 집. 암끝검은표범나비와 호랑나비 몇 마리가 꽃밭을 들락거린다. 담장과 지붕 위를 허술한 담쟁이가 타고 오르고 돌담 옆엔 수레 없는 빨간 경운기가 놓였다. 퇴락해 가는 것들 맞은편엔 새로 얹은 기와가 빤지레한 집이 있고 그 앞 넓은 땅은 다지는 중이라 황량하다. 낡은 것과 새것을 무심한 백일홍이 아무렇게나 피어나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놓았다. 꽃을 옮겨 다니며 꿀을 먹는 호랑나비의 날갯짓이 아름다워 낡은 집이 서서히 퇴락하기를 기도하듯 바라보았다.



땅을 기다가 잎을 꼭 다물고 진 (미국)나팔꽃은 두 연인이 손잡으려 다가가며 죽어가는 애달픈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웃었다. 어쩌자고 꽃잎 얽혔을까. 빨간 맨드라미와 크고 진한 잎맥을 가진 칸나와 가로등을 타고 오르다 열매 맺은 박주가리와 잎이 까맣게 타 겨울나무처럼 선 벚나무와…… 또 이렇게 걸음은 늦어진다. 산길에 들어서자 나무에 드리운 그늘이 빛으로 찬란하다.


난데없이 모기가 달려든다. 올여름 날것들이 적어 적응이 되질 않는다. 손수건으로 모기를 쫓으며 걷는다. 졸참나무 이파리 아래 까만 눈을 가진 털북숭이 빨간 벌레가 빼꼼하다. 귀엽다. 잎 뒷면을 보면 기다란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게 징그럽다. 참나무재주나방 애벌레란다. 성충 나방은 영락없이 부러진 나무토막같이 생겼더라. 재밌어 직접 보고 싶어진다. 번데기로 겨울을 난다 하니 봄에는 볼 수 있으려나. 그러나 나무에 피해를 꽤나 주는 벌레인 것 같다. 여러 곳에서 참나무를 먹이 식물보다 가해 식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나팔꽃
참나무재주나방 애벌레


붉나무 꽃이 피어나고 솜나물 가을꽃이 피는 길을 걷는다. 감나무나 사람주나무 이른 단풍이 보일 법도 한데 조용하다. 칡꽃 향만이 짙게 내려앉아 발길에 폴폴 코끝으로 파고든다.

약수곡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곳에서 쉰다. 팽나무 그늘이 서늘하다. 올해는 개망초보다 망초가 우세한데 크고 환한 꽃을 가진 개망초가 꽃이 있는 줄도 모르겠는 망초보다 빈터의 쓸쓸함을 더욱 짙게 표현해 낸다. 슬픔이나 외로움이 찬란하려면 아름다움을 품어야 한다. 폐허에서 피어나는 꽃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대지의 슬픔을 알기 때문일 터이다. 바위에 가만히 앉아있자니 바람도 찾아오고 제비나비도 다녀간다.


앉았던 바위가 약간 뾰족했다. 일어나니 하반신이 마비가 온 듯 저리다. 산이 떠나갈 듯 우는 매미 소리도 저릿저릿하다. 가까이서 들려 찾아봐도 잘 찾아지진 않는다. 한참을 여기저기 찾다가 바로 코앞에서 매미를 발견하고 어이없어 웃었다. 보호색이 아주 감쪽같다. 오늘 본 매미들은 진득하지 않고 울고는 휙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무슨 전략인지 모르겠다.


매미 앉은 참나무에서 보이는 경주 들판이 시원하다. 바람이 좋아 또 쉬어간다. 드문드문 익은 노랑이 섞인 들녘의 가을빛과 빼곡히 모여 도시를 이룬 건물들과 흐르는 강줄기를 보며 바람을 맞는다. 좋다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좋다! 산에 부는 바람만큼 좋은 건 없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쉬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 같다. 쉬며 머무는 시간이 참 좋다. 신발 벗어 놓고 초록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무니 상큼한 즙이 입안에 퍼지며 행복감은 배가 된다. 마음은 이렇게 또 초록물이 든다.


금오봉에서 용장사지 쪽으로 내려간다. 이 길에도 내가 좋아하는 쉼터가 여러 곳이다. 널찍한 바위에 소나무 그늘이 있고 게다가 조망까지 툭 트인 자리가 그중 가장 뛰어난데 오늘은 충분히 쉬어 눈길만 주고 내려간다. 도토리가 살이 올라 토실토실 굵어진 것이 가을이 머지않았나 보다.


남산 약수곡에서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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