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 날다

2025. 8. 14. 동남산~옥룡암

by 풀잎

날이 다시 폭폭 찐다. 이른 더위 후에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덥지는 않았다. 다른 지역에 열대야가 있다 했을 때도 경주는 그렇게까지 덥지 않았고 입추 전후로는 선풍기마저 돌릴 일이 없었다. 해마다 더위에 대한 반응 기준 온도 선이 올라가는 것 같다. 이제 33도 이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35도쯤 되면 덥다 하고 37도 이상이면 매우 덥다 한다. 예전에는 30도만 넘어도 매우 덥다 했다. 모처럼 34도 더위에 숨이 막힌다.


그래도 계절의 색은 변하고 있다. 너른 들판에 군데군데 노릇노릇 구워진 이삭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삭 패기 시작하는 새파란 논도 있다. 벼가 훌쩍 키를 키운 그늘에서는 습한 곳을 좋아하는 식물들이 자란다. 벗풀, 사마귀풀, 물달개비 등이다. 하양, 분홍, 보라 꽃들이 청초하다. 논물도 물이라고 물 좋아하는 꽃들이 갓 세수한 듯 말간 것인가 싶다. 밭에서는 고추가 이글이글 빨갛게 익었는데 일손이 부족한지 따지 않고 있다.


따가운 햇볕 아래를 지나 숲으로 들어선다. 이 서늘함은 무어란 말인가! 딴 세상으로 순간이동한 것 같은 온도 차다. 밤새 비가 지났는지 땅이 축축하다. 버섯이 자라고 짚신나물 노란 꽃이 드문드문 피고 벚나무 노란 잎들이 진다. 오랜만에 나비들도 제법 날아다니는데 흔한 나비들이라 무심히 본다. 작년에는 짝짓기를 비롯해 다양한 나비의 생태를 볼 수 있었는데 올핸 나비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러니 작년의 그것은 순전히 나비 생초짜의 운빨이었던 것인가 보다. 그렇듯 유혹하고는 나비가 너는 이제 잡은 물고기라며 어떤 선물도 주지 않는 격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나비가 또 나를 유혹한다. 팔랑나비다. 황알락팔랑나비로 찾아진다. 팔랑나비의 까맣고 동그란 눈과 주황 갈색 몸빛을 보고 금세 헤 벌어지고 마는 입, 넘나 귀여운지고. 호랑나비 굴뚝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 등이 멀리서 휙 지나도 더는 아쉽지 않다.


황알락나비


가을꽃 뚝갈이 피었다. 작은 꽃송이들을 보자 힘이 난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나는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꽃은 산길에 나의 에너지원이다. 그러나 몇 포기 뚝갈이 다다. 다시 늘어지는 몸으로 심심한 길을 걷는다. 생강나무 열매가 발갛게 익어간다. 생강나무 열매는 녹색→빨강→검정으로 익는다. 보통은 두 단계인데 어찌 세 단계를 거치는 걸까. 에너지가 드는 일을 여러 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궁금해진다.

감태나무도 열매를 많이 달았다. 녹나무과 생강나무속인 감태나무는 생강나무와 열매가 똑 닮았다. 암수딴그루지만 한반도에는 암그루만 있어 수정 없이 혼자서 열매를 맺는다. 식물의 세계는 신기방기 상상초월. 호모 사피엔스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고추잠자리 꼬리가 붉게 물들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수컷만이 붉어진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겠구나, 붉어진 꼬리에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금오정에 들르지 않고 바로 옥룡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 길은 좋지 않다. 볕이 온전히 가려지지 않아 덥고 조망도 없고 계곡도 없다. 어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으로 걷는다. 빽빽 고집스러운 새소리가 들린다. 흰배지빠귀 어린 새 같다. 어미를 찾는 모양인데 어미는 보이지 않는다. 가깝지는 않아도 나 때문에 어미가 못 오나 싶어 지켜보다 몇 발짝 걸으니 울음소리 그친다. 어미를 만난 걸까. 새끼 새들이 제법 자랐다. 떠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더위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 같아도 계절은 순환하고 있다.

옥룡암에서 불경 소리 들린다. 다 내려왔구나. 계곡물소리도 시원하다. 단풍나무 아래로 물이 흐른다. 녹색 단풍나무 잎에 드리워진 빛으로 인해 개울은 녹색 보석이 흐르는 물길이 되었다. 에메랄드 가득한 물로 땀을 씻는다. 이런 보석이야 얼마든지 취해도 되겠지. 초록빛 물에 두 손을 담근다.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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