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라나요

2025. 8. 7. 삼릉~삼불사

by 풀잎

3일 연속 밤마다 비가 내렸다. 습기가 밤을 지배하는 날엔 끈적끈적 눅눅했고 바람이 습기를 걷어가는 날엔 시원했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몸의 기운도 출렁인다. 오늘은 입추고, 입추 다음엔 말복, 아직 한낮 더위가 가시기엔 이르다. 예전엔 하늘의 기운이 가을을 준비하면 열대야는 없었는데 기후 변화로 이제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해도 입추, 선선한 가을 향이 바람 끝에 묻어온다.


오랜만에 삼릉 길로 남산을 오르려 한다. 망월사에 들러 목백일홍의 자태를 잠시 감상한다. 계단 아래에 추적추적 비 맞은 꽃잎이 분분하다. 두터운 구름과 나무 그림자에 든 꽃잎이 어둡다. 어둠을 먹은 꽃잎이 비 내린 다음 날의 깊고 운치 있는 아침 서사를 완성한다. 몇 포기 감아올린 포도 넝쿨에선 까맣게 농익은 포도 향이 건너온다. 취기를 머금은 듯 어지러워 그 아래 오래 서 있기가 어려웠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무들은 어지럽지 않았을지. 용케 꽃 피우고 열매를 익혔다. 망월사 나무들 곁을 서성이다 삼릉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있는 무덤들도, 삼릉 솔숲에 내려앉은 빛도 어지러운 느낌이라 실제가 그러한지 내가 흔들리는 것인지 헷갈린다. 어야든동 소나무재선충이 휩쓸고 있는 비명 속에서 이만만 하게 살아남아 부드러운 곡선으로 어울려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어지러운 빛 속에 푸른 솔숲이 아름답다.


망월사 배롱나무


버섯이 조금 보인다. 비가 오고도 포자가 얼마 발아하지 못한 것 같다. 온도와 습도가 엇박자를 낸 걸까. 다른 해에 비해 버섯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평소엔 이쪽 계곡도 말라 있는데 오늘은 연일 내린 비에 숲이 물소리로 넘친다. 바닥도 물기로 축축하고 하늘을 덮은 나무도 촉촉하여 이것이 '피서'로구나 한다. 어디에서도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땀은 어김없이 주룩주룩 흐른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물을 건너, 건너, 산을 오른다.

머리 없는 부처, 큰 바위에 새긴 부처, 삼릉골 어디에나 계시는 여러 부처들을 지나 나의 못생긴 부처(삼릉곡 선각여래좌상) 앞에서 쉰다. '나의 부처'라 명명하고 난 후 언제나 이곳에서 쉬게 된다. 평안한 마음이 들고 그의 눈빛도 다정하게 느껴진다. 홀로 걷는 길에서도 나의 무엇을 만드는 존재가 인간인가, 다만 나인가. 오늘도 부처는 아무 말 없고 나는 그저 편안히 쉬다 일어선다.


이 길엔 홀로 등산객이 많다. 인사도 없이 조용히 오르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매미 소리 기세에 새들 사라진 길을 나도 조용히 걷는다. 맴맴맴, 참매미 소리와 새소리 인가 착각하게 되는 애매미 소리 등 다양한 매미 소리 들려온다. 가느다란 줄기를 부여잡고 탈피한 매미 허물을 본다.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자세에 순간 경건해지는 마음. 나는 간절한 적이 없고 지금도 생이 간절하지는 않으나 간절했을 매미의 생은 아름답다 생각한다. 매미도 자기 삶의 끝을 알고 있을까. 죽음을 인지하고 사는 건 인간밖에 없다지만 본능에 죽음이 새겨져 있지 않고서야 저리도 간절할 수 있겠는가. 허물 벗은 매미는 어디선가 짝짓기에 성공했기를, 매미의 건투를 빈다.


상선암의 호두나무와 고욤나무의 푸른 열매가 싱싱하다. 바둑바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주 들판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시원하다. 금오봉 가는 길에 있는 사람주나무 잎 몇 장이 붉다. 이른 단풍에 입추가 가을 체면을 차렸으려나.

내려가는 길은 삼불사 능선이다. 나무가 하늘을 가리지 못하는 능선 길은 피해야 하는 계절. 다른 이들은 모두 피했는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다행히 구름이 해를 가려주어 그만만 했으나, 작은 옹달샘 있던 자리에서는 달밤에 숨바꼭질하다가 물 마시러 달려온 노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 철철 넘쳐흐르는 삼릉 길이 그새 그리웠다.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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