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고라니를 만나

2025. 7. 3. 늠비봉~포석정

by 풀잎

덥다. 낮도 덥고 밤도 덥고 아침도 덥다. 새들도 더위에 기운을 잃었는지 숲이 조용하다. 망월사 비파나무에 열매 익었으면 한 개 맛볼까 하였는데 너무 높은 곳에 달려 맛의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큰애와 둘이 가는 산행이라 꾀꼬리 소리 들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흔한 박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비잠자리들만 수면 위를 날며 청록빛 춤을 춘다.


날이 더워 길을 짧게 잡았다. 숲은 집보다 덜 덥지만 그래도 땀은 엄청 흐른다. 올핸 이상하게 날벌레가 잠잠하고 거미줄도 거의 없어 뚝뚝 흐르는 땀에 그것들이 엉기지는 않는다. 원인을 모르니 좋아해도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별일 없는 숲길을 조용히 걷는다. 꽃도 새도 나비도 바람도 물소리도 없다. 해는 구름에 살짝 가려진 것 같다. 무엇 때문인지 푸르른 녹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게 없는 길에 사람도 우리 둘뿐이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 큰까치수염 꽃에 앉은 팔랑나비를 보고서야 숲이 활기를 얻는다. 처음 보는 나비다. 나비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저만치에 가만히 있으라 하고 살금살금 다가간다. 나비는 빨대 입을 길게 내어 꽃꿀을 먹느라 바쁘다. 쪽쪽 먹는지 몰라도 내 눈에는 콕콕으로 보이는 입질이 귀엽다. 웬일로 아이도 나비가 귀엽다 한다.


지리산팔랑나비


가느다란 물줄기를 만나 손을 씻는다. 물은 미지근해도 시원함을 주기엔 부족하지 않다. 아이가 바위채송화를 보고 있는 내게 어서 와보라 손짓한다. 물속에 물고기라도 있나 싶어 다가가니 신나 하며 내게 물을 뿌린다. 시원하다.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잠깐 놀았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구절이 생각난다. "푸른 사과가 / 없는 사과보다 낫다 / 이곳은 북위 61도이다" 가느다랗고 미지근한 물줄기여도 없는 것보다 낫다. 오늘은 섭씨 37도다.


계곡을 벗어나니 평지 같았던 길에 살짝 경사가 생긴다. 밤을 꼴딱 새우고 온 아이는 숨을 가빠한다. 어쩌자고 따라나선 걸까 걱정이 되는데 외려 말은 퉁명스럽게 나온다. 천천히 오라 하고 나도 천천히 가다가 한참씩 기다린다. 기다리며 섰는데 능선에 작은 점으로 선 탑이 보인다. 멀어 작아진 탑, 한참을 보고 있자니 저곳에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오랜 세월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들에는 한결같음의 미덕이 있다. 나는 뒤에서 숨 가빠하며 오는 딸아이에게 안도감과 믿음을 주고 있을까. 나는 늙어서도 그럴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도 든다. 탑은 오랜 세월 굳건하건만.


우리의 걸음은 한없이 느리다. 아이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나무를 보다 길가에 산조팝나무가 있었다는 것에 놀란다. 신갈나무에서 꽃보다 예쁜 충영도 본다. 나풀나풀 꽃인지 붉은 단풍인지 감쪽같이 예쁜 벌레집이다. 반복에서 차이를 보기 위해서는 될수록 느려져야 한다. 느린 걸음 덕에 로봇처럼 생긴 작은 날파리도 볼 수 있었다. 청록색 색감에 쇠 같은 느낌의 몸통이 영락없는 로봇 파리다. '아이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정찰하고 올 것', 명령을 내리면 위이잉 모터 소리를 내며 날아갈 것 같다. 그러나 아이는 내 눈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붉은빛이 많은 갈색 하늘소의 짝짓기를 보며 기다린다.


신갈나무 충영
붉은산꽃하늘소의 짝짓기 / 얼룩장다리파리


부흥사 주변에 새들이 부쩍 많다. 소리는 내지 않고 움직임만 부산하다. 동고비와 쇠딱따구리 딱새 멧새들이 조용히 먹이를 구한다. 새들로 인해 갑자기 숲이 깊고 진해진 느낌이 든다. 감정적으론 오늘 처음 만나는 녹음이다. 짧은 새들의 길이 끝나고 구부러진 길을 돌아드니 구름바다에 우뚝 선 오층 석탑이 다가온다. 석탑이 날개를 얻어 하늘에 펼쳐진 것도 같고 하늘에 풍덩 빠진 것도 같은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이 한없이 푸르고 환하다.


석탑이 드리운 손바닥만 한 그늘에 앉아 아이에게 물과 방울토마토를 먹여 내려갈 체력을 보충시키며 쉰다.

눈앞에 펼쳐진 여름은 어찌 이다지 깨끗하고 시원하고 쾌활한 것인가. 실상은 덥고 끈적하고 작열하는 태양에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데. 이 여름 더위가 무참하게 꺾여 열매가 익기 좋을 정도로만 뜨거웠으면 싶다.


부흥사를 통과하여 임도로 내려간다. 이제는 숨이 가쁘지 않은 아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성격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해, 어떤 감정을 일게 하는 우리의 내면에 대해. 꽃대를 길게 낸 싸리꽃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그 꽃에 앉은 요정 같은 나비들을 보면서, 갑자기 여기저기서 노래하는 다양한 새소리를 들으면서, 무엇보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


산을 다 내려왔을 즈음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놀라 옆을 보았다. 세상에, 어머나, 너무 깜찍하고 예쁜 새끼 고라니가 놀라 숲 안쪽으로 들어간다. 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배수로에 숨어 있었던 걸까. 아이들 그림책에서 본 작고 예쁜 새끼 노루처럼 날씬한 다리로 풀쩍 뛰어 사라진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뒤에 똑같이 생긴 아기 고라니가 한 마리 더 있다. 우리를 보고 놀란 것인지 관찰할 요량인지 가만히 서서 우리를 본다. 찰칵 셔터 소리를 듣고서야 풀쩍 뛰어 형제 뒤를 따라간다. "엄마, 우리더러 사진 찍으라고 기다려줬나 봐." 우리는 온갖 수선을 떨며 기쁨을 나눈다.

두 마리 아기 고라니는 금방 나무 사이로 사라졌는데 또 만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차고 넘쳐 길 위에 줄줄 흘렀을 것이다. "오늘 산에 오길 역시 잘했어." 아이가 기쁨에 차 말한다.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늠비봉오층석탑
싸리꽃과 푸른부전나비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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