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15. 용장사지~이영재~용장마을
창 밖으로 누런 강물이 흐른다. 두텁게 내려앉은 진회색 구름이 산 아래로 내려앉는다. 새벽의 일이었다. 아침으로 가는 길에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난다. 오랜만에 흠뻑 내린 비다. 천둥 번개까지 요란하였으나 숲의 생명들도 두 팔을 벌려 환영했을 터이다. 오랜만에 편안하게 숨 쉬었을 것이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의 조화는 언제 보아도 시원하다. 비록 하늘에 닿지 못해도 나도 구름이 되어 하늘을 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맑게 쏟아지는 햇살에 백일홍도 환하게 웃는다. 모감주나무는 눈부시게 푸른 하늘에 연두색 풍선을 날린다. 축제의 주인공은 풍등 같은 그의 열매다. 하늘을 수놓은 열매가 바람 따라 하늘거리니 내 마음도 하늘하늘하다.
굽은 골목을 돌면 나팔능소화 아름다운 집이 나온다. 담장은 담쟁이로 덮였고 대문 위에서부터 쏟아진 능소화는 골목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툭, 꽃잎 떨어지는 소리 들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묘한 떨림과 울림을 전해와 잠시 숨을 멈추게 한다. 지는 꽃은 기어이 순간의 정적을 만들어내고 만다. 나는 다시 한번 정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참을 기다리며 서성이지만 기다림은 그저 나의 일인지라 꽃은 무심하다.
우르르 쾅쾅, 시원한 숲의 향기가 서늘하게 폐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계곡물소리가 귀청을 먹먹하게 한다. 모든 소리가 물소리에 잠식된다. 평소에 마른 길이었던 작은 지류에서도 물이 넘쳐흐른다. 비 온 다음날은 숲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활기차다. 평소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평범한 길에 생생한 색을 입히는 것은 화려한 그 무엇이 아니라 무색무취의 비다. 비 온 다음날엔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풍경은 자신이 가진 내면을 오롯이 드러냄으로써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으아리 소박하게 피었고 원추리 저 멀리 숨어 드문드문 피었다. 들판의 진한 주황색 왕원추리와는 달리 차분한 노랑이 소박하다. 작은 표주박 같은 때죽나무 열매도 조롱조롱 예쁘다. 계곡으로 쏟아지는 물소리는 더욱 커지는데 그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쯔쯔쯔쯔때때때때때 요란한 새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새 한 마리가 입에 벌레를 물고 누군가를 부른다. 새들이 날아든다. 칡때까치인 것 같다. 세 마리가 어울려서 이러쿵저러쿵하는데 멀어서 뭐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까우면 다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하 하아.
돌 징검다리를 아슬아슬 건넌다. 물이 넘쳐 자칫 잘못하면 풍덩 빠질 것 같다. 무사히 건너 걷는데 무언가 파다닥 움직인다. 작은 새다. 아직 잘 날지 못하는 어린 새가 내 걸음에 놀랐나 보다. 포르릉 땅에서 얼마 떨어지지 못하고 겨우 난다. 직박구리인 것도 같고 배가 주황색인 것이 되지빠귀 어린 새 같기도 하고, 모르겠으나 귀엽다. 어미는 어디 가고 혼자인지, 빗속에 길을 잃은 것인지 안쓰럽기도 하다. 나를 피해 숲 안쪽 나무 위로 날아간다. 잘 날지 못해 다칠까 싶어 쫓지 않는다. "부디 살아남아 어엿한 성조가 되렴."
설잠교를 지나 용장사지로 오른다. 이 길도 평소와 달리 물이 넘쳐흐른다. 나무들 활기차 봄날처럼 싱그럽다. 용장사 터를 지나 조망이 툭 트이자 뭉게구름 피어나는 하늘이 성큼 다가온다. 둥근 삼층 대좌에 앉아 계신 머리 없는 여래도, 바위에 고요히 들어 계신 마애여래도, 남산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도, 하늘을 이고 있는 푸른 산도 모두가 파란 하늘 흰 구름 속에서 노닐고 있는 것 같은 날이다. 나도 탑 그늘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더없이 좋은 풍경을 누린다. 자연은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그저 푸르기만 한 것으로, 그저 흩어졌다 모였다 자유롭기만 한 것으로, 그저 이파리를 스치며 불어오는 것만으로. 아, 아름답다!
금오봉 쪽으로 올라 삼화령으로, 이영재로 그곳에서 용장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남산에서 만큼은 자유로운 나는 어디로든 길을 잡을 수 있다. 오늘은 계곡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빛과 나무가 그림을 그리고 그 사이로 볕뉘 떨어지는 길을 걷는다.
작은 새들이 모여 노는 숲길을 지나 산정호수 길과 만나는 곳에 이른다. 다시 물소리가 힘차게 쿵쿵거린다. 하, 이곳에서 양말을 벗게 될 줄은 몰랐다. 평소엔 좁은 물길인데 오늘은 어디를 봐도 내 짧은 다리로 폴짝 건너뛸 수가 없겠다. 이 계곡물은 용장마을의 식수로 쓰이기에 입수를 금하고 있지만 별 수 있나 양말을 벗고 찰방찰방 물을 건넌다. 핑계 김에 잠깐 발을 담그고 선다. 시원하다. 하얗게 이는 물보라는 내 몸과 마음에도 일어 묵은 상념을 씻어낼 것만 같다.
산길을 벗어나기 얼마 전 내 앞을 무언가 휘리릭 지나는 것을 본다. 작은 초록색 뱀이다. 놀라 우뚝 멈췄는데 하는 양을 보니 제가 더 놀란 모양이다. 정신없이 길을 가로지르더니 그 아래 숲 바닥으로 절벽에서 몸을 툭 던지듯 떨어지는 거다. 뭐, 다치지는 않았을 거라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나보다 더 놀란 뱀이 우스워 키득키득 웃었다. 아무래도 언제나 산의 짐승들이 사람 기척에 더 놀라는 것 같다. 나는 최상위 포식자 사람이다. 어흥, 놀라 어서 도망가거라!(실은 내가 무서우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