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8. 바람재~칠불암
칠불암에서 신선암으로 가는 짧은 길은 암릉을 오르는 재미가 쏠쏠한 길이다. 쌕쌕거리며 올라 높은 바위 위에 서면 남쪽으론 경주의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동쪽으론 멀리 토함산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는 낮은 산 능선이 길게 누워있다. 바위에 앉아 쉴 때면 저 숲에도 길이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길이야 있겠지만 아직 내게는 없는 길이었다. 어느 날 이 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바람재, 이 길로 오르면 칠불암 마당이 마주 보인다고 했다. 들머리가 어딘지 정확히 알지 못하여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초행길이라 숲이 휑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새해 첫 산행을 바람재로 가기로 한다.
칠불암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사과 과수원을 지난다. 첫 계곡을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꺾어들었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길인데 가자고 드니 길이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이 길이 맞는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길이 또렷하여 안심이 된다. 오솔길 양쪽으로 진달래가 소복하고 하늘 위로는 소나무가 푸르다. 하얀 나무숲인 지금도 제법 아늑한데 봄이 되어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면 걷는 걸음걸음 진달래 고운 빛 뚝뚝 묻어나는 아름다운 길이겠다.
툭툭, 나무 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오색딱따구리 두 마리가 주거니 받거니 나무를 쫀다. 단조로운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이 이곳은 딱따구리 숲인가 보다.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다가 다시 걷는다. 길이 한 번 갈라졌었는데 나는 직진을 하였었다. 이 길이 맞을까 의심이 들 무렵 마른 낙엽과 함께 바람이 우수수 쏟아진다. 바람재, 바람에게도 길이 있기 마련이라 바람이 잘 흘러드는 길이라서 바람재라 하였겠지, 믿음이 생겨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는 제법 또렷한 길이 여기저기로 나있는 거다. 남산은 국립공원이라 시그널도 없다. 아마 이 길은 비법정탐방로인 듯 이정표도 하나 없다. 길은 또렷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또 또렷해진다. 바람재 능선길이라 했는데 능선이 아니라 숲 안쪽을 걷는 것 같아 미심쩍어 하면서도 나는 무작정 위쪽으로 길을 잡으며 걷는다. 길이 사방으로 난 것이 버섯 채취꾼들이나 재선충에 걸린 소나무 벌목 작업자들이 낸 길일 수도 있다. 곳곳에 벌목한 소나무 무덤이다. 하여간에 헤맬 마음을 먹은지라 불안하지는 않다. 그러고도 길이 없으면 다시 내려가면 된다. 오른편 건너 숲 위쪽으론 내내 밝은 햇살이 비쳐 따뜻하다.
어찌어찌 오르다 보니 차 한 대는 지나도 될 것 같은 넓은 길과 만났다. 얼마쯤 가다 보니 또 길이 갈린다. 더 넓은 길을 택해 직진하였는데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되돌아가다 떼 벗어진 허름한 무덤 앞의 비문을 읽는다. "… 엄마 곁에 있기에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 엄마는 내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나에 봄꽃 우리 엄마" 무덤의 주인이 엄마인지 나인지 헷갈리는 비문이나 '나에 봄꽃 우리 엄마'에 마음에 실금이 간다.
슬픈 무덤을 지나 오른쪽 길로 내려간다. 근거는 딱히 없지만 이 길이 맞구나라는 확신을 주는 길이다. 이번 겨울 들어 처음 싸하니 추운 산행이었는데 햇살 다사롭게 펼쳐져 마음 데펴진다. 왼쪽으로 새갓골이 보이고, 마지막 남은 의혹을 떨치고 걷자니 조망이 툭 트이는 바위가 나온다. 바위 병풍을 두른 곳에 아, 내가 올라온 길이 다소곳이 누워있고 골과 골이 겹친 것 같은 풍경이 드러난다. 바람이 사납게 불어댄다. 바람이 없다면 한참을 앉아 쉬었다 갔으면 싶은 곳이다. 한동안 서 있다가 돌아 나왔다.
몇 걸음 차이로 순식간에 바람은 사라지고 따뜻한 햇살만 비추인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 지금 바람은 어디를 불고 있는 건가.
"저 수평선은 마음 안에 있습니까, 마음 밖에 있습니까?"
"그릇이 큰 사람에게는 안쪽에 있을 것이요,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는 밖에 있겠지요."
어제 문태준 시인의 산문에서 읽은 수평선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어느 괴짜와 화가가 나눴다는 대화 장면이 떠올랐다.
드디어 아는 길을 만났다. 새갓골에서 봉수대 가는 길, 조금 더 가면 백운재 갈림길이 나온다. 오늘은 그곳에서 칠불암으로 바로 내려갈 거지만 다른 날엔 백운재에서 고위봉을 갔다가 칠불암으로 돌아가도 되고, 시간과 체력이 넉넉하다면 금오봉까지 갔다가 남산동 마을 어디로 내려가도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남산은 길이 억수로 많아 골라 걷는 재미가 있다. 내 몸의 상태와 기분과 시간에 맞게 쏙쏙!
봉수대를 지나 고위봉이 마주 보이는 높고 큰 바위 위에서 바람을 등지고 앉아 쉰다. 바람을 등지니 토함산이 마주 보인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얼굴엔 따뜻한 햇살만 가득 쪼여 다숩다. 등은 겨울 가슴은 봄, 내 몸이 바람의 경계가 되었다. 수평선을 마음 안에 들이기는 어려워도 바람과 햇볕 속에 들어앉아 햇볕을 넉넉히 즐길 만은 한 몸이요 영혼이라 자부한다. 그러나 끝내 손끝 시려 오래 있지 못하고 이제는 나의 길이 된 바람재를 뒤로하고 스님의 독경 소리 들리는 칠불암에 잠시 머물다 산을 내려간다. 전선 위에 앉은 떼까마귀의 윤기 반지르르 까만 엉덩이들의 행렬이 볼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