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5. 약수곡~용장사지
입춘 지났다고 봄바람이 부는가. 흐린 안개 사이로 폭신한 바람이 깃든다.
지난 월요일 아침 콩을 목욕시키고 나오니 눈이 온다고 남편에게 톡이 와 있었다. 눈은 그새 그쳐 있었지만 밖에 나가니 바닥이 하얬다. 산에는 몇 번 쌓였었는데 마을에 눈이 쌓인 것은 삼사 년은 되었지 싶다. 아득한 기억이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다 나와 눈을 뭉쳐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크게 굴릴 양은 아니어서 작은 눈사람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썰매 타는 아이까지, 동네가 들썩들썩 잔칫날 같았다.
눈이 순수한 것은 하얗기 때문이 아니라 동심을 세상에 펼쳐놓기 때문일 것이다. 뽀득뽀득 새하얀 눈에 발자국을 남기는 게 어디 어린아이만의 일이던가. 꽁꽁 언 마음도 온기 전해지면 금세 스르르 녹거나 단단한 마음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아이는 눈사람을 잃고서 배운다. 눈의 마법은 영원할 것이나 계절의 순환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법, 성큼 오른 기온에 낙엽 수북한 계곡에 얼음은 온데간데없고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계곡을 따라 걷는데 공포 영화에서처럼 내 곁을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스윽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다람쥐인가, 잠시 후에 드러난 정체는 굴뚝새다. 어둠 속에서 나와 작은 나뭇가지에 앉는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멀리서는 밤색 뭉치로 보였는데 이제야 촘촘한 검은색 가로줄무늬와 날개 끝 흰색 점이 보인다. 주머니에 쏘옥 넣어 다니고 싶은 외모. 그러나 금세 포르르 날아 바위 아래로 사라지고 만다.
잠시 기다리다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이 기다리고 있는 산을 오른다.
낙엽송은 소나무처럼 바늘잎을 가졌지만 낙엽이 진다. 멀대같이 큰 나무 꼭대기에 솔방울이 다글다글 달려 있다. 가지째 꺾여 바닥에 떨어진 것도 많다. 제미나이의 설명으로는 대부분 솔방울 씨앗을 좋아하는 청설모의 짓이라는데 이 숲은 그런 것 같지 않다. 파먹은 흔적이 없다. 다음으로는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인 나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했거나 바람의 짓이라는 설명. 나무는 똑똑하고, AI는 명쾌하고, 나는 감탄만 하고, 에효.
땀이 콧방울에 송골송골 맺혀 약수곡 4사지에 이른다. 주변 잡목을 싸악 베어 주변이 훤해졌다. 문화재 정비를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개복숭아나무와 내가 좋아하는 팽나무는 그대로 있어 안심이다. 근처 바위에 앉아 쉰다. 새들이 내 머리 위로 휙휙 지나다닌다. 특히 곤줄박이 녀석들이 그런다. 팽나무 열매를 좋아하는지 팽나무에 몰려든다. 오늘은 멧비둘기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바가지를 벅벅 긁는 듯한 소리를 겨우내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유난이다. 봄이 온 줄로 아는 모양. 오랜만에 들으니 시끄러운 그 소리도 정겹다. 작은 새들 먹으라고 땅콩을 부숴 바위에 올려놓고 다시 걷는다. 곤줄박이 한 마리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다가 살짝 비켜간다. 눈 찔리는 줄 알았다, 휴우.
얼굴 없는 두 부처께 인사하고 오르막을 오른다. 금오봉이 가까워지자 들려오는 다양한 새소리, 그러나 어치의 모노드라마다. 감상한다. 새끼 강아지 소리를 냈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가 까치처럼 꺅꺅거렸다가 삐이삐 휘파람 소리를 내기도 한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오만가지 소리를 혼자서 한참 내다가 날아가 버렸다. 어치는 나처럼 혼자서도 잘 노는 새 인가 보다.
금오봉에서 용장사지로 내려간다.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미세먼지 뿌옇다. 숲은 새들 이외에는 아직 조용하다.
지난주에 본 물총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에 용장골로 가는 걸음이 바빠진다. 차고 맑은 물에 손을 씻고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 구석에 사십 분쯤 앉아 있었으나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정오 무렵은 물총새의 활동이 뜸한 시간대라 한다. 돌아가야 할 시간도 되어 마음을 접고 남은 길을 걷는다.
작은 날갯짓을 눈으로 좇는다. 뿔나비다. 뿔나비는 성체로 겨울을 난다. 날이 따뜻하여 활동을 시작했나 보다. 올봄은 이렇게 내게 뿔나비로 먼저 당도한다. 따뜻한 햇살을 듬뿍 담은 주황색 무늬가 봄볕처럼 따스하다. 한 마리 나비를 만나고 그리고 또 한 마리를 만나고,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데 발밑에서 몇 마리 나비가 화르르 날아오른다. 어머나, 봄이 무리 지어 왔구나.
立春, 봄의 기운을 우뚝 세우기에는 기운이 약한 것 같아 入春이 더 적절한 것 아닌가 생각하였는데 나비들은 그리 생각지 않나 보다. 네발나비도 따뜻한 들판을 팔랑팔랑 난다.
검은이마직박구리도 다시 만나지 못해 서운함이 컸는데 부풀 대로 부푼 백목련 겨울눈 사이로 갑자기 새 한 마리 날아든다. 나는 처음 보는 찌르레기다. 반갑다, 새야, 나비야, 미리 온 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