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의 애씀으로

2026. 2. 12. 불곡~옥룡암(동남산)

by 풀잎

갓 나온 아침 햇살에 맑은 물빛이 일렁이는 하천의 모래톱에서 백로 네 마리가 어울려 놀고 있다. 그중 부리가 노란 한 마리 백로는 월등하게 크고, 나머지 세 마리는 새끼처럼 작다. 새들이 눈부시게 하얀 날개를 퍼덕이면 동그란 물방울이 튕겨 오르고, 방울방울 물빛은 천진한 아이의 꺄르르 웃음소리로 터져 투명한 햇살에 반짝거린다. 다정한 어미가 세 마리 새끼와 물장구를 치며 노는 듯한 풍경을 차로 지나며 스치듯이 본다. 어쩔 수 없이 부드러운 모래톱에 아쉬움 한 조각 떨어진다.


불곡으로 가는 길, 가지를 넓게 뻗은 소나무에서 새들이 삐악 대는 소리가 들린다. 쫑쫑, 삐이삐, 사람의 소리로 변환한다면 내게는 이렇게 들리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흉내일 뿐이다. 여하튼 한 그루 소나무는 작은 새들을 찾는 나의 입장에서는 울창한 숲이 되고, 그 작은 소리와 작은 흔들림을 찾아 눈길로 나무 숲을 헤맨다.

찾았다, 쇠박새처럼 작은 새들이 휙휙 날다가 가지에 내려앉아 대롱거린다. 녹색 빛이 많고 언뜻 검은색도 드러나는 작은 새, 방울새 같지만 내가 아는 방울새보다 크기가 더 작다. 검은머리방울새일지도 모르겠다. 새들은 너무 빠르고 그들을 쫓기엔 내 눈은 많이 낡았다.


노랑턱멧새, 박새, 쇠박새, 방울새, 새들의 아침 인사가 분주한 숲에서 오늘도 굴뚝새 한 마리 보았다. 꼭 한 마리, 단독 생활자 굴뚝새를 좇다가 물웅덩이에서 작은 움직임을 포착했다. 두 마리 방울새(?)가 물을 먹고 있다. 세수를 하는 것도 같고. 어야든동 급한 볼일을 해결했는지 금세 포르르 날아가 버린다.

볕이 몸에만 들어 얼굴은 그늘에 가려진 할매부처(불곡마애여래좌상)께 인사한다. 세월 가도 늙지 않는 할매부처의 약간 숙인 지긋한 눈길은 그늘 속에서도 따듯하다. '곧 설이에요. 부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새들을 가까이서 오래 보게 해 주세요.' 턱도 없는 소원을 빌고 떠난다.


목련 겨울눈


오랜만에 나무들의 겨울눈에도 눈길을 멈추고 바라본다. 단풍나무 발긋하고, 진달래 단정하니 곱고, 철쭉은 통통하다. 그러나 이맘때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어야 할 생강나무와 목련 겨울눈은 아직도 옹송거리고 있다. 특히 목련은 마을에서 보던 털북숭이 통통한 백목련 겨울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마르고 작아서 도저히 목련류 겨울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올봄 이 길의 꽃이 풍성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그렇다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작아지진 않는다. 목련 겨울눈을 살짝 어루만지고 떠나려는데 높은 가지 위로 청딱따구리 두 마리가 날아든다.

올려다본 하늘 여기저기에 새들의 빈 둥지가 있다. 키 큰 소나무 가지에 둘, 등로 가까운 낮은 가지에도 하나. 짝짓기 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새들의 목소리가 곱고 부드러워지고 있다. 봄의 노래, 사랑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람 외에는 고요한 숲이었는데 임도로 나오자 한 무리의 등산객이 앞서가고 있다. 눈도 비도 없어 건조한 길에 먼지가 풀풀 인다. 걸음을 빨리해 그들을 따라잡는다. 내친김에 숨을 할딱거리며 조금 더 빨리 걷는다. 나는 요즘 너무 느리게 걸어 저속 운전만 해서 성능이 저하된 자동차 같다. 가끔이라도 속도를 내주어야 한다. 얼마쯤 빨리 걷고 나니 몸이 풀리며 계속 빨리 걸어도 될 것 같은데 옥룡암 표지판이 코앞이다. 평탄한 길을 다시 설렁설렁 걸어 내려간다.


이 길은 심심하여 내면에 귀 기울이기 좋다. 그러나 나는 요즘 겨울 숲에서도 고요해지지 못한다. 새들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작은 움직임에도 눈길을 곧추세우느라 바쁘다. 그렇게 또 유리딱새 암컷을 만났다. 철와곡에서 처음 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철와곡과 이 길은 하나의 영역권이라 할 만큼 가깝다. 새는 아주 멀어지지는 않지만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푸른 꽁지로 유리딱새 암컷임을 알아볼만한 거리에서 옮겨 다닌다. 온몸이 푸르스름한 수컷은 없나? 지난번엔 유리딱새를 만난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는데 이제는 수컷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 보고 싶다! 그 사이 새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청딱따구리

새는, 새는 잡을 수 없는 행운 같아서 늘 야속하다. 그러나 운이 없지 않고서야 스치듯이라도 만났겠는가. 고로 나는 운이 좋다. 운칠기삼이라 했으니 나머지 삼은 나름의 애씀이라 해두자. 운칠을 기삼으로 꽉 잡지 않으면 운도 소용이 없을 터, 당분간은 숲에서 고요를 찾기보다 새를 만나는 기쁨을 선택할 것이다. 결국은 이 기쁨이 내 안의 고요를 만들기도 할 터이다.


새들마저 조용해진 숲을 나온다. 들의 햇살엔 더욱 환한 봄이 들어있다.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잎은 아직 붉어도 논두렁에 피어 있는 큰봄까치꽃 몇 송이 꽃에는 봄의 생기가 가득하다.

아침에 본 백로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차가 가까이 가니 큰 백로(중백로 혹은 대백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작은 백로(쇠백로?)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미 새가 새끼를 지키는 모양새다. 차를 갓길에 대고 새를 본다. 큰 백로가 돌아와 작은 백로들 사이에 선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 물에는 오리들이 무리 지어 유유자적 흐른다. 차에 올라 떠날 때 보니 백로 네 마리가 모래톱에서 내려와 오리들 있는 물속을 함께 거닐고 있다. 사냥에 나선 건가, 아쉬움을 또 한 조각 남기고 나는 떠난다.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렴!'


백로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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