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26. 이무기능선~열반곡
촉촉한 바람에 묻어 온 봄기운이 완연하다. 한껏 가벼워지는 마음, 봄은 나비의 날갯짓과 같이 가벼이 온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훅 하고 끼쳐오는 젖은 낙엽 냄새가 호흡기를 지나 뱃속까지 거침없이 들어온다.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막힌 속을 뚫고 시원하게 콸콸거리며 흐른다. 이틀 전 내린 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푸슬푸슬 먼지가 내려앉은 것 같은 매화도 피었다. 남녘의 만개한 매화 소식을 들어오던 참이어서 꽃이 늦다 생각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항상 2월 말에 꽃잎을 열던 나무였다. 비교하지 않았을 때는 2월의 이른 매화 한 송이에도 놀라워했었다. 많은 정보가 삶의 경이를 방해하기도 한다.
숲 가장자리에 가여울 정도로 가늘고 약한 나무에도 꽃이 달렸다. 노란 꽃밥이 가득한 백매의 환한 얼굴은 싱그럽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숲은 아직 고요하다. 움찔움찔 그 속이야 얼마나 간지러울까마는.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구름은 무거워도 바람은 한없이 가볍다. 이무기능선을 땀을 흘리며 오른다. 쌔액쌕 숨이 가쁘고 콧마루엔 땀방울이 맺힌다. 어쨌거나 남산에선 가장 힘든 길이다. 처음의 신선했던 젖은 낙엽 냄새는 점점 부패의 향을 피워 올리며 가벼운 두통을 일으킨다.
한껏 물을 먹은 소나무 숲엔 오랜만에 파릇한 생기가 돈다. 물먹은 나무들의 부푼 겨울눈을 살피며 걷는다. 웬만큼 알아본다 생각했던 겨울눈이 다시 낯설다. 흔한 진달래도 헷갈리고 빼꼼 얼굴을 내민 때죽나무 잎눈도 못 알아보다가 수피를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자연의 얼굴은 수시로 변하고 어느 한때라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세계다. 어디 자연만 그러할까. 타인의 마음은 물론이고 내 마음조차 잊고 지내다 보면 자칫 몰라보기 십상이다. 나를 어찌 잊고 지낼까 싶지만 가장 자주 잊고 지내면서도 그러는 줄도 모르는 게 내 마음 아니던가.
이 길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바위를 지나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쉰다. 항상 까마귀들이 공중을 선회하며 나는 곳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깍깍거리는 까마귀들의 대화를 내 멋대로 번역한다. "어디 가, 같이 가." "어여 와, 어여." 까마귀의 날갯짓은 제법 분주하여 새까만 빛깔에 비해 촐싹맞아 보이는데 나는 이러한 어긋남과 가벼움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까마귀가 있는 풍경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앞서가던 까마귀가 기다려주고 있을 것만 같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오고 땀이 식으며 한기가 느껴진다. 요즘 마음이 조금 무겁다. 내가 나에게 '너를 잊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는 중이다. 나는 신호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중이다. 옅은 안갯속을 걷듯 가벼운 우울감 속에 머무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한 계절이 다음 계절로 넘어가기 위해서도 변화의 혼란을 겪는 환절기를 지나야 한다. 환절기엔 변화에 적응하느라 아픈 이들이 는다. 마음의 계절도 마찬가지다. 계절을 지나기 위해선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마음의 계절은 자연의 순차를 따르지 않으므로 내가 맞고 싶은 다음 계절이 봄의 생동인지 겨울의 고요인지 그것부터 살펴야 한다. 아, 마음엔 한 계절만 머무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속을 헤치다가 복잡함만 깨닫고 그만 일어난다.
고위봉을 지나 열반곡으로 내려간다. 길은 촉촉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덜꿩나무와 분꽃나무 겨울눈이 통통하다. 올괴불나무는 조만간 꽃잎을 열겠다. 두 개로 갈라진 분홍색 꽃망울이 상긋방긋 부풀었다. 척척 마른 줄기 늘어진 덩굴나무 무성한 숲에 이르자 나무를 쪼는 새소리가 넘쳐난다. 처마 아래 서서 듣는 빗소리 같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곤줄박이들이 넘나들고 오색딱따구리 암수 두 마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줄기를 타고 오르며 나무를 쫀다. 나는 줄기를 나선으로 뱅글뱅글 돌고 있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머리가 붉은 수컷을 지켜본다. 쇠딱따구리도 다녀가고 요즘 가장 즐거운 박새는 또로로롱 노래한다. 낙엽을 들추고 다니는 녀석도 있다. 다람쥐가 떼굴떼굴 굴러 내 바로 앞까지 왔다. 가만히 서 있어서 사람인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치자, "어,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깜짝 놀랐잖아! 사람 맞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사람으로 결론을 지었는지 갑자기 획 돌아 멀어진다.
아직은 봄빛 완연하지 않아도 숲이 봄의 생동으로 들썩인다. 봄의 선물이 내게 도착한다. 올괴불나무 한 겨울눈에서 벌어진 두 송이 꽃, 햇살 한 줄기 비추지 않아도 곱고 예쁘게 피어 춤을 추고 있다. 자줏빛 토슈즈를 신은 봄의 발레리나가 되어. 나는 그만 다 잊고 온전히 기뻤다.
산 아랫마을엔 더욱 이른 봄이 활짝 피어 산수유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고 매화는 하얀 꽃잎이 몽실몽실하고 광대나물은 보랏빛 합창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