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3. 5. 토함산 시부거리
구름이 짙거나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열흘 가량 해도 달도 보기 어려웠는데 어젠 해가 반짝 나고 새벽엔 달빛이 잠시 스며들어 왈칵 반가웠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기어이 오고야 마는 것들이 있다. 거리의 산수유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려 봄으로 가는 길을 내고 촉촉하게 젖은 흙 위로는 앙증맞은 새싹들이 옹기종기 돋아나 봄빛 수다를 떨고 있다. 특히 동글동글한 꽃마리 싹이 귀엽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전쟁으로 새잎 같은 열 살 남짓의 어린아이들이 165명이나 죽었다. 전쟁광 네타냐후와 세계 깡패 트럼프를 보고 있기가 역겹다. 인류의 봄이라 할 수 있는 평화는 영영 오지 않으려는지.
아침 안개가 자욱하여 날이 맑을 줄 알았는데 다시 흐림이다. 맑아질 것을 기대하며 토함산 시부거리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갈색의 숲 바닥에서 희끗한 것을 본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꽃잎을 열지 않은, 새끼손톱보다 작은 흰노루귀다. 분홍노루귀도 몇 촉 보이지만 아직은 다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산을 오른다. 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는 마법이 일어나 걸음이 가볍다.
유리산누에나방 고치가 바닥 곳곳에 떨어져 있다. 여태 고치 안에 곧 우화할 번데기가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유리산누에나방은 10~11월에 우화를 한단다. 작년 가을에 성체를 보긴 했다. 성체 나방은 입이 없어 얼마 살지 못하므로 봄에 우화해서 가을까지 살아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겨울 고치 안에 든 것은 알일 확률이 높다고 AI가 알려준다. 성체가 빠져나간 고치라고 하기에는 선명하고 고운 색 그대로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게 많다. 겨울 숲에 색채 한 점 더하는 초록 비단 주머니가 이 숲에는 유난히 많은 데다 이 고치의 색감과 모양을 좋아하는 내 눈에는 더 쏙쏙 들어온다.
일찍 잎을 내는 조팝나무류와 쥐똥나무와 산철쭉 가지엔 초록 점이 빼꼼빼꼼하다.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아직은 잎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슬몃 미소 짓기에는 충분하다. 노루귀는 조금 이르고 실은 변산바람꽃을 보고 싶었다. 변산바람꽃 자생지는 계곡 정비로 살아남을지 알 수 없어졌지만 등로에도 드문드문 피었었다. 한 송이면 충분할 것 같았는데 오늘은 아예 보이지 않아 서운하다. 복수초 군락지엔 꽃대가 올라왔지만 아직 꽃잎엔 아직 연둣빛이 많다. 제법 노란 꽃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복수초도 내려갈 때 다시 만나기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잣나무 숲에 이르렀을 때에야 새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박새, 오목눈이, 곤줄박이, 쇠딱 오딱 딱따구리들 그리고 동고비 같은 자주 보는 새들이다. 숲 한쪽 죽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 모여있다. 숲은 건강한 나무만 있다고 건강하지 않다. 건강한 숲은 큰 나무 아래 작은 나무들이 살고 그 나무 아래에선 낙엽이 썩고 또 죽은 나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숲이다. 삶과 죽음과 부패가 한자리에서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숲. 죽은 나무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랴 구애하랴 한창 바쁜 새들을 한가로이 본다.
아, 박새들은 구애의 축제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어찌나 활발해지고 노랫소리도 예뻐졌는지 그들 소리에 숲이 조명을 밝힌 듯 화사해진다. 동고비의 단조로운 삐삐 소리도 맑고 깨끗하여 심금을 울리는데 직박구리까지 고운 소리를 내어 깜짝 놀랐다. 사랑할 때는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고 예뻐지지. 싸낙배기 직박구리 너조차 말이다.
겨울이라 수피가 흐려진 진달래 철쭉 층층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하얀 숲길을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간다. 어치들은 쌈박질을 하는지 시끄럽고, 씨앗 빠져나간 귤색 노박덩굴 깍지가 예뻐서 주워왔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은 열매 단지에 넣었더니 겨울 숲 유리산누에나방 고치처럼 고동색 열매들 사이에서 환히 빛난다.
끝내 해가 나오지 않아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려가는 길에는 복수초가 노란 꽃잎을 활짝 열었다. 잘못하여 밟을라 꽃 없는 윗길로 갔는데 결국 아래로 내려가 꽃 앞에 선다. 복수초의 노랑은 순하고 맑다.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순하고 맑은 꽃을 피워내는 이 시기의 꽃은 늘 경이롭다. '너, 누구를 위해 꽃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에 고맙다. 제 스스로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의도치 않아도 다른 이를 행복하고 기쁘게 한단다. 그러니 그저 스스로 빛나면 되는 것이지.'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숲 여기저기 노랑 등불이 켜져 반짝이고 있다.
계곡의 물도 맑다 못해 투명하다. 물소리 들으며 조금 더 내려가니 이번엔 솜털 보송보송 노루귀가 꽃잎을 환히 열고 반긴다. 홀로 우아한 꽃, 여럿이 한데 모여 다정한 꽃, 흰 꽃, 분홍 꽃, 어우러져 언제나 그렇듯 내 마음의 봄을 환히 밝힌다. 굵은 나무뿌리 아래 모두어 핀 꽃들이 바람이 불자 산들 한들 흔들리는데… 바람도 다정하여 그들을 보는 내 마음이 다 좋았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숨을 가쁘게 쉬며 야생화가 어디에 있느냐 위치를 묻는 이를 만났다. 일러주고 몇 걸음 내려오니 노루귀는 물론이고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복수초도 노랗게 피어있는 게 보여 돌아보니 이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숲으로 들어간 그가 꽃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머리가 하얀 그 여인은 꽃을 만났을까. 작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려면 세밀하게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되었기를, 꽃을 만나 기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