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2. 송화산
구미산의 봄 식생이 궁금하여 갔다가 코앞에서 돌아섰다. 산불 예방 차원에서 4월 말까지 입산을 금하고 있다. 실은 지난주 토함산도 그랬다. 내게 화기는 없고 그날은 촉촉해서 무시하고 들어갔지만 오늘은 건조한 날씨라 돌아섰다. 이 시기 입산 금지는 꽃쟁이들에게는 한숨이다. 사람들아, 제발 산에서는 어떤 화기도 사용하지 말자. 차를 돌려 아까시나무 쪽동백나무 꽃 피던 작년 늦봄 이후 가지 않았던 송화산으로 향한다.
소나무재선충으로 죽은 소나무가 많아 송화산은 점점 헐벗은 산이 되어가고 있다. 숲에 들면 보이지 않던 하늘은 물론이고 도로와 마을도 훤히 내다보인다. 그럼에도 오솔길이 남아있고 적당히 차고 적당히 까슬한 바람이 불자 숲의 공기는 기분 좋게 상큼하다.
사나운 가시를 촘촘히 달고 있는 어린 아까시나무가 많은 길을 지난다. 가시 많은 나무들도 어느 정도 자라면 가시를 만들지 않곤 한다. 그러니까 가시는 작은 강아지들이 더 앙칼지게 짖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순전히 자기 보호의 목적이다. 그러나 사람의 방어기제도 그렇고, 타인에게는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제 자신이 커지고 단단해지면 가시는 필요 없게 된다. 사는 게 지리멸렬할 때 짧게라도 산책을 하면 가시가 무뎌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별 기대는 없었는데 상큼한 공기를 호흡하고 나니 오늘 길도 내 안의 성난 가시를 조금이나마 무디게 해 줄 것 같다.
아까시나무 가시를 하나 뗀다. 똑 떼지는 것으로 보아 잎의 일부가 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줄기(일부)가 가시가 된 경우엔 잘 떨어지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찔레의 가시처럼.
어머나, 소나무 줄기에 다람쥐가 콕 박아 놓은 잘 익은 도토리 같은 저것은 소나무한입버섯이다. 다른 소나무에는 알밤 크기도 있다. 살아있는 나무에 돋는 것은 드물게 보았는데 죽은 나무에는 흩뿌려놓은 것처럼 많구나. 노릇하게 구워진 빵처럼 생긴 녀석도 있어 하나 따 속을 열어본다. 쫄깃하게 갈라지고 속은 폭신한 스펀지 같고 향은 표고버섯과 비슷하다. 따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아 식용버섯이라니 채취하고 싶지만 나는 버섯을 좋아하지 않아 그냥 둔다. 가는 길 내내 죽은 나무가 많아 버섯도 많았다. 먹는 사람 있으면 따다 주고 싶을 만큼 많았다.
사나운 가시를 빙 두른 두릅나무줄기에서는 곧 잎이 돋아날 것 같고, 꽃망울을 방긋 부풀린 진달래도 곧 활짝 피어날 것 같다. 쇠박새와 동고비 들이 나를 무시하고 날아다닌다. 꽤 가까운 나무에서 줄기를 타고 오르며 노래하고 줄기를 쪼느라 바쁘셔서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무시는 얼마나 기쁜지. 검은 선이 매력적인 동고비의 눈매와 쇠박새의 부드러운 하얀 가슴을 보며 흐뭇했다. 흔하다 하나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는다.
그리고 진달래, 산을 오를수록 점점 더 꽃망울 벌어지는 게 많아지더니 황량한 벌판 같은 숲 언덕에서 나무 전체가 활짝 꽃잎을 연 나무를 만났다. 폐허에서 피어난 작은 들꽃처럼 메마르고 헐벗어진 산에서 피어난 진달래에 울컥 반가움이 인다. 연분홍 해사한 꽃잎에 햇살도 들고 꿀벌도 폭 고개를 묻는다. 회양목 꽃이 피어도 벌의 기척이 없어 걱정을 했었는데 벌 소리 윙윙대니 얼마나 좋던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는지 다리에 뭉쳐 놓은 꽃가루 주머니가 큼직하다. 벌의 윙윙 소리를 들으며 이 산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내려놓는다. 나무가 비어 햇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이 숲은 언젠가 다시 울울해질 것이다. 졸참나무, 층층나무, 덜꿩나무, 분꽃나무, 팥배나무, 벚나무 씨앗들이 흙속 어디선가 움찔움찔 돋아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겠지, 꿀벌아?"
한껏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걷는다. 큰갓산이 가까워진 곳에서 이번에는 생강나무 꽃 핀 것을 본다. 우와, 토함산의 생강나무 아무런 기척이 없어 생각도 못했는데 이곳은 톡톡 터져 활짝 벙그러졌다. 향을 맡기 위해 꿀벌처럼 코를 드민다. 약간 들척지근하고 알싸한 향이 쑤욱 몸으로 들어온다. 대개는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나는데, 오늘은 식욕이 돋는다. 먹고 싶다, 참는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나중 만난 꽃을 한 뭉치(겨울눈 반쪽에서 난 정도) 따 먹었다. 쌉싸름하다, 질기다, 뱉고 말았다. 그렇지만 생강나무 꽃 맛을 보아 좋다. 조금 더 꽃을 알게 된 기분이 든다. 생강나무 꽃은 향을 먹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다는 것을.
베어낸 나무가 많지만 쓰러진 나무도 제법 많다. 쓰러진 나무 아래를 기거나 나무를 타고 넘으며 정글을 통과하듯 지난 길도 있었다. 나무들이 서로서로 거센 바람을 막아주며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보듬었을 텐데 텅 빈 공간에서 바람은 폭군이 되고 홀로 선 나무들은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또 살아남은 나무들은 묵묵히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귀룽나무는 삐죽삐죽 새잎을 내었고, 굴피나무도 밖을 염탐하고 있다. 개암나무는 연두색 수꽃을 치렁치렁 달았다. 지렁이 같아, 하며 툭 건드렸더니 노란 꽃가루가 묵은 먼지처럼 폴폴 인다. 마른 줄기에 빨간 꽃술 암꽃도 앙증맞게 피었다. 꽃은 보아도 보지 못할 정도로 작지만 오늘 꽃은 말미잘 촉수 같은 암술이 또렷하고 색이 짙어 홍매화 핀 듯 바라보았다. 모두 수정이 되면 열매가 제법 많이 열리겠지만 하도 속아 가을 개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십 년 넘게 산을 다니는 동안 두어 개 먹어본 게 다다. 그래도 암꽃 특이하고 예쁘니 봐주기로.
큰갓산에서 옥녀봉 가는 길이 툭 끊겨 있다. 도로를 내는 공사 중이다.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사람이 있어 나도 돌아 돌아 길을 건넜다. 공사가 끝나면 사람이 다니는 길도 나겠지만 굳이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내야 했을까. 나무 몇 그루 남지 않아 더욱 휑해진 길을 올라간다. 높은 언덕을 넘자 다시 나무가 많아진다. 옥녀봉 쪽이 큰갓산 쪽보다는 피해가 덜한 것도 같다.
진달래, 생강나무, 개암나무가 먼저 연 봄길 위에 덜꿩나무 새침한 겨울꽃눈이 뒤따른다. 토함산에서는 보지 못했고 2주 전 남산에서 한 송이 겨우 보았던 올괴불나무는 이곳에선 이미 절정을 지나 색이 바래고 있다. 안 그래도 희미한 꽃이 꽃자주 색 꽃밥마저 터진 후 더욱 희미해지고 있지만 햇살 도타워지는 것과 속도를 맞춰 폭신한 잎을 낼 것이고 열매 붉게 익혀 갈 것이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아쉬울 것도 없지만 또 아쉬운 것이 사람 마음이고 이 마음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마음일 것이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옥녀봉 아래 의자에 앉아 쉰다. 직박구리가 가까이 날아와 뭔가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울 콩도 자주 그러는데 직박구리의 고갯짓이 너무 귀엽다. 가만 보니 새 앞에 누가 부셔놓은 견과류 가루가 있다. 콕 집어 맛을 보더니 입맛에 맞지 않는지 날아간다. 큭큭, 직박구리가 소식하는 것 처음 본다. 나는 괜히 힘이 나서 내리락 오르락 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내려왔다.
형산강변 버드나무 숲 버드나무줄기는 은빛털 보송보송한 수꽃을 조롱조롱 매단 채 바람에 하늘거리고, 아래엔 갈퀴덩굴과 사상자 초록 잎이 땅을 빼곡히 덮어 폭신폭신하다. 곁에 보라색 꽃이 빼꼼하여 살폈더니 자주광대나물이 있더라.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라 눈과 마음이 다 환해지고 기뻤다. 걷는 동안 사나운 마음이 변형된 가시 한 조각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나무를 잃은 송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