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피었습니다

2026. 3. 19. 일성왕릉~늠비봉

by 풀잎


오각별 꽃망울이 열리며 살구꽃 피었습니다

맑은 햇살에 방금 세수하고 나온 해사한 낯빛이에요

보드라운 살구꽃 꽃잎 위로

휘파람새의 호로로롱 찌잇 휘파람 소리 내려앉습니다

마을 옆 숲에 벌써 여름철새 휘파람새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호오로롱 찌잇 소리를 따라 걷습니다

박새 참새 직박구리 까치 딱새 시끌벅적합니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온갖 새소리 묻힙니다

개도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 끝을 따라가는데

방울새가 고요히 노란빛가루를 뿌리며 날아갑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참새들은 기와 아래 틈새를 드나들며 놀기를 좋아합니다

참새가 기와 위로 내려앉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네요

어 어 어, 경사진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아슬아슬 위태로워요

발끝으로 제어하려는 몸짓 그러나

주르르 미끄러져 물받이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얼굴을 빼꼼 내미네요

나는 그제야 여유롭게 웃습니다

새나 나비가 발을 헛디뎌 낑낑대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몸 개그의 달인들입니다 대개는 개그로 끝나니 다행이지요

그들도 실수를 한다는 게 우스워요 인간적 아니 생명적인가요

잡동사니 쌓인 허름한 대문가에 수선화 푸른 잎이 싱그럽습니다

3월의 수선화는

맑은 노랑꽃등잔을 팡팡 터뜨려 낡은 공간을 갤러리로 변모시켜 놓았습니다

예술이란 게 별거던가요

요 작은 생명 몇 포기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았다면 그것이 예술이지요

담쟁이 겨울 줄기가 벽에 그려놓은 나무 그림처럼요

다시 들려오는 컹컹 소리

윤기 잘잘 까만 털 개가 옥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봅니다

묶여있는 줄 알았는데 자유로운 것 같아요 계속 따라오며 짖네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소리만 요란해요

옥상에 있을 거라곤 예상 못해 놀랐지만 안녕~ 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합니다

까만 전선 위로 까만 새 두 마리 내려앉습니다

부리가 노르스름하고 주변이 희끗한 것이 찌르레기네요

다섯 마리 일곱 마리 무리 진 찌르레기들이

찌르르 찌르르 노래해요

산수유 노란 꽃가지 사이 작은 새 한 마리는 휘파람새인가요

숲에선 휘파람새 노래해도 나무에 앉은 새는 침묵하니 알 수 없습니다

논과 밭의 흙을 갈아엎은 봄 들판은 겨우내 굳었던 흙이 보슬보슬

고양이의 털과 같이 보드랍습니다.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남간 마을 아침 풍경에 이 시가 떠올랐다. 경주에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휘파람새 소리에 흥분한 아침이었다. 마을을 걷는 것만으로 이미 봄은 충만하였지만 작은 저수지를 지나 산에 간다. 저수지 주변 나뭇가지 틈새엔 밥그릇처럼 생긴 낡은 둥지가 두 개 있었다. 물가를 좋아하는 개개비의 것이었을까. 주머니나방 고치도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처럼 달려 있었다. 튼튼하게 지은 고치 속에서 암컷은 평생을 나오지 않고 그곳에서 산란하고 죽는다. 날개나 다리가 퇴화된 채. 이런 진화의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인간인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오리 몇 마리가 수면 위를 부드럽게 지나고 있었는데 가끔 물수제비 뜨듯이 통 통 통 착착착 움직이기도 했다. 물에 비친 소나무는 봄빛 어린 버드나무 같았다. 물 건너 덤불숲에서도 휘파람새 휘파람 소리 들려왔다. 평범한 저수지가 내게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민물가마우지 물에 잠긴 바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날개를 말리는 건지 먹이를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성왕릉 주변의 소나무는 한껏 푸르렀다.



생강나무는 대체로 연둣빛 가득 품은 노란 꽃을 활짝 터뜨렸고 진달래는 짙은 자주색 꽃망울인 것이 많았다. 국수나무 새잎이 삐죽 돋아나고 있었다. 어제 온 비로 숲의 공기는 촉촉하고 달달하였으나 가까운 곳에서 기계톱 소리가 진동했다. 계속해서 죽은 소나무들이 생겨나고 있다. 매캐한 소음 속에서 금오정까지 걸었다.

금오정에서 바라본 들판은 미세먼지로 뿌옜다. 바로 늠비봉으로 내려갔다. 새들이 시끄럽게 다투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김없이 그곳엔 어치들이 있었다. 째지는 소리 잦아들더니 나뭇가지 위 두 녀석은 그저 한가로워 보였다. 나도 한가로이 그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석탑 아래에서 쉬었다. 딱새가 날아와 맑게 울었다. 노랫소리 뒤에 붙는 딱딱딱 소리는 꽁지 깃이 내는 소리다. 딱새는 그렇게 딱새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흥사를 지나며 연둣빛 새잎 돋은 나무를 보았다. 봄은 땅을 갈아엎듯 개혁적인 얼굴로도 오고 새잎 돋는 귀여움으로도 온다. 밭둑에선 머위가 잎보다 꽃대를 먼저 내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쌉싸래한 머위를 생각하자 봄도 쌉싸름해졌다.


계곡물엔 미끄덩한 개구리알이 많았다. 부흥사 근처에서 본 굴뚝새를 아래에서도 보았다. 자꾸만 나보다 조금씩 앞서갔다. 하도 작고 빨라 금방 눈앞에서 사라지려니 했는데 물가에서 쯔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먹이 찾는 일에 한참을 열중한다. 5분가량을 한 곳에 머문다. 이렇게 오랫동안 보기는 처음이다. 동영상 찍은 것을 보았더니 마지막에 나뭇잎 반 장 뒤로 몸이 쏙 사라진다. 숨바꼭질하면 절대 들키지 않겠다. "오래 놀아주어 고맙다, 굴뚝새야."

뿔나비들이 자꾸 길을 막아서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산을 마저 내려왔다. 포석정 마을에서 청띠신선나비를 한 마리 보았다. 날개가 나달나달 낡아 있었다. 뿔나비들보다 겨울나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청미래덩굴 잎이 돋아날 시기를 가늠하여 알을 낳고 생을 다할 것이다. 여름에는 날개 고운 2세들이 푸른빛을 흩뿌리며 날아다닐 것이다. 여름 나비보다 겨울을 나야 했던 나비의 생이 더 고단할까. 인생이 그렇듯 나비의 생도 복불복. 어쩌겠는가, 그저 살아야지.


버드나무 연두색 꽃이 가득 피어 먼 곳에서도 봄빛 환한 길을 걸어 남간 마을에 도착했다. 3월엔 누구라도 생동하는 봄빛 어리운 길을 걸어야 한다. 하얀 냉이꽃, 푸른 봄까치꽃, 노란 꽃다지꽃, 보라색 광대나물꽃, 푸른 생기 뛰놀고 봄의 향기 어리고 미친 봄의 불길 흐르는 길을.


야광나무? / 머위 꽃
청띠신선나비
냉이꽃 / 봄까치꽃 / 꽃다지




토요일 연재
이전 10화가시를 없애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