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2026. 3. 26. 무장산

by 풀잎

주차장 보도블록 틈으로 싹을 올린 냉이, 벼룩이자리, 꽃다지가 서로 자리를 다툰다. 냉이는 흰 꽃을, 꽃다지는 노란 꽃을, 벼룩이자리는 꽃을 기다리는 중인데 초록 잎이 장미꽃 같다. 저들끼리 사이가 어떤지는 몰라도 올망졸망 들꽃을 바라보는 나는 그저 흐뭇하다.
봄마다 휴대전화의 화면을 열면 온통 꽃이다. 내 것도 꽃이고 남의 것도 꽃이다. 꽃 사진에 어지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이게 어디 온라인 세상만의 일인가. 밖을 잠깐만 걸어보라. 눈에 치이고 발에 걸리는 게 꽃이다. 그러니 어느 날은 그만 보았으면 싶을 때도 있다. 세상이 온통 꽃이기만 한 것이냐고 묻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봄이 왔는데 꽃을 보는 것 외에 달리 또 무엇이 중한 것일까. 봄이 매년 돌아온다고 해서 지금 오늘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다. 그러니 오늘의 봄을 맞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게다가 직접 꽃을 대면하는 순간엔 매번 마음이 환해진다. 시들지 않는 경이의 마음이 내게 있음이 감사하다.

무장산 가는 길 하천의 주인은 노랑할미새다. 숲의 계곡까지 길게 이어지는 길에서 노란 배가 산뜻한 노랑할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음치인 내가 말하기엔 머쓱하나 할미새들도 명금이라 하기는 어렵다.
아직은 초록 기운 닿지 않는 산기슭, 화살나무 겨울눈이 분홍색 볼 터치를 한 것마냥 홍조를 띤다. 끝에 초록 잎을 살짝 물고 있다. 사르르 분홍 솜사탕 같은 고운 털에 덮인 덜꿩나무 겨울눈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직 갈색이 주를 이룬 숲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이른 봄 무장산은 처음이다. 들꽃이 많은 산은 아니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꽃대를 낸 산괴불주머니가 드문드문 보일 뿐 진짜로 제비꽃 한 송이도 없을 줄이야. 나뭇잎 드리워지지 않은 넓은 길에 볕이 쏟아져 아침부터 얼굴도 따갑다. 마을에서 정상까지 6.5Km, 짧지도 않아 심심해지기 쉬운 길이다. 진달래도 어쩌다가 보이는 봄산이라니, 조금 너무하다 싶다. 그래도 노랑할미새가 꼬리를 까닥이면 다람쥐가 부스럭거리고, 저희끼리 희롱하느라 바쁜 뿔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생강나무 뭉텅뭉텅 노랗고, 올괴불나무 흐린 꽃들 바람에 춤추니 봄산은 봄산이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는데 계곡 정비 후 아치형 다리가 여러 군데 생겼다. 그중 한 곳을 건너자 노란빛이 나를 끌어당긴다. 괭이눈이다. 꽃 주변 잎까지 노랗고 털이 없는 것이 선괭이눈인 것 같다. 올알옹알 작은 꽃 속에 노란 꽃밥이 앙증맞다. 숲 안쪽까지 노란빛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괭이눈을 따라 눈길을 옮기다 노루귀를 발견한다.
어머나, 흰 노루귀인 줄 알고 다가가 보니 보랏빛이 스며든 청노루귀다. 우와, 우와, 경주 산에 청색 노루귀가 산다니, 놀라운 발견이다!
확실히 청노루귀다 할 수 있는 건 두 송이 정도고 꽃술 주변에만 살짝 보랏빛 도는 거의 흰색에 가까운 게 많다. 그럼에도 엄연히 청노루귀다. 지난주엔 휘파람새 소리에 깜짝 기뻤는데 청노루귀 선물까지 받을 거라고는 정말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이쁘다, 이쁘다, 이쁘다니까~ 노래가 절로 나온다. 꿀벌 없는 이른 봄산에 나만큼이나 기쁜 재니등에가 정지 비행을 하며 꿀을 빤다. 작은 곤충들도 온몸을 꽃에 비비고 있다. 전엔 꽃을 예쁘게 담고 싶어 빨리 떠나라 성화했지만 이젠 기쁘게 지켜본다. "부지런히 수분을 도와줘, 꽃들이 더 많이 피어나게."

노루귀 옆에는 맑고 해사한 꿩의바람꽃도 피었다. 무리를 이루지는 않고 드문드문 한 송이씩 떨어져 있다. 현호색은 무리 져 있는데 이제 막 올라와 예쁨이 덜하다. 중의무릇은 잎만 올라왔다. 나는 처음 보는 미치광이풀이 커다란 잎 속에 꽃망울을 폭 싸안고 있다. 잎을 열어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때가 되지 않은 꽃을 보아 무엇하겠나, 이렇게라도 보아 너무 좋다. 비탈을 올라 있는 꿩의바람꽃과 괭이눈을 살펴보니 영역이 넓지는 않다. 그러나 바위틈에서 올라온 한 송이 큰괭이밥도 보아 더 바랄 게 없다.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정강이가 아파도 좋아서 웃음만 났다. 이런 나를 보고 노루귀도 웃었을까. 내가 참새가 발을 헛디딘 것을 보고 그랬듯 등에가 조롱은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흙 묻은 손을 씻는다. 맑은 물이 기분 좋게 차다. 다리가 무거운 오늘, 손을 씻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난다. 이제부터 층층나무가 많아진다. 새가지가 붉어 숲의 하늘이 발그스름하다. 올괴불나무 꽃 흔들리는데 청딱따구리 소리가 들려온다. 삐삐삐삐 삐이피 피이피피피, 강하고 높은 소리가 뒤로 갈수록 낮아지고 느려진다. 서어나무 가지 끝에 털 보송한 잎이 뭉쳐 있다. 새잎처럼 예쁘지만 벌레집이다. 어린 나무라 성장에 방해가 될 것 같다. 벌레들이 나무를 조종해 제 집을 만드는 것은 볼 때마다 이런 가스라이팅도 없다 싶다. 공생이라 하기에는 나무가 얻는 이득이 없단다. 다행히 버드나무 통통한 버들강아지는 기쁘게 만난다. 소교목으로 자라고 갯버들처럼 버들강아지 꽃이 크고 예쁜 것이 호랑버들인가 싶다. 조금 있으면 노란 꽃술을 터뜨릴 것이다. 이렇게 억새밭이 있는 정상에 닿는다. 약간의 오르막에도 숨을 쌔근대며 올랐다.

아무도 없는 산에 나 혼자다. 나비나 새도 조용한 시간, 바람조차 가만하다. 벌써 볕이 뜨거워 나는 그늘을 찾아 앉는다. 날이 따뜻하니 하늘이 뿌옇다. 바람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펴고 눈을 감는다. 크게 피곤할 일 없이 사는데도 늘 피로한데 감은 눈으로 피로가 씻겨 내리는 것 같다. 바람이 지나간다.
한참을 앉았다가 걸으니 다리가 또 묵직하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인 대신 반이나 짧다. 아래로 갈수록 진분홍 투명한 진달래가 방긋방긋 꽃잎을 열어 길이 환하다. 이 산의 진달래꽃 색은 다른 곳보다 진하여 그리움보다 반가움이 앞선다. 쇠딱따구리가 빡빡 소리를 내 지나쳐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벚나무에 앉으니 위장색이 따로 없다. 나는 오늘도 숲에서 선물 한 보따리를 받았다.



#냉이, 벼룩이자리, 꽃다지
#화살나무 겨울눈
#선괭이눈?
#청노루귀
노루귀와 재니등에
#꿩의바람꽃
#큰괭이밥
#미치광이풀
#서어나무 겨울눈과 충영(혹등에)
#호랑버들?
#무장산 정상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