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2. 산정호수~백운암~열반곡
도심의 거리가 새하얀 벚꽃 구름으로 몽글몽글 부풀었다. 벚꽃 향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향마저 진하였다면 봄은 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봄의 생기 가득한 하얀 꽃구름 사이를 황홀히 지났다.
용장마을 주차장엔 노란 꽃밥을 터트린 용버들이 꿈틀꿈틀 가지를 늘어뜨려 아름답다. 참새들이 바쁘게 드나든다. 콕, 무엇을 쪼았는지는 모르나 바닥으로 나풀 떨어졌다. 참새가 고개를 내밀어 갸우뚱 바라보다가 포기한다. 나는 버들꽃 사이에서 노니는 그런 참새를 바라본다. 봄까치꽃 꽃잎 꼭 다물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 꽃잎 열렸다. 지켜보고 있으면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다시 보면 또 꽃잎 열려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술래가 된 기분이다.
집집마다 분홍 하양 노랑 꽃들 피어 있다. 연둣빛 품은 자두꽃에선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실려 오고 작약 붉은 새순에선 생을 향한 잎의 의지가 강렬히 전해온다.
숲에 들어서니 물소리가 시원하다. 이틀간 내린 비에 숲이 촉촉, 나무들은 물을 흠뻑 길어 올려 물광으로 빛나는 새잎을 삐죽삐죽 냈다. 세상에 봄 햇살만큼 바지런한 것은 없다. 겨우 일주일 사이에 숲을 연두색으로 차르르 물들였다. 4월이니까, 햇살이 속삭이는 것만 같다. 굴피나무는 아직 주먹을 쥐고 있지만 분꽃나무 사방오리나무는 잎을 활짝 폈다. 봄의 숲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것은 때죽나무 새순이다. 물먹은 연두 잎들이 먹이 달라 조르는 아기 새 주둥이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강렬히 욕망하는 생명력이라니, 아름답다.
숲 입구에서 올해 첫 남산제비꽃을 만났다. 제비꽃 못 보아 온전하지 않던 봄이 무색하게 예쁘고 싱그럽다. 여리고 부드러운 청미래덩굴 새잎과 꽃망울을 보고서는 몸도 마음도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울컥 경건한 마음마저 일 정도로 부드럽고 고요하였다.
계곡의 물소리와 바닥에서 돋아나는 풀꽃들과 나뭇가지에 움트는 새잎들의 수런거림에 나의 모든 감각도 쉴 틈이 없다. 겨울을 성충으로 난 낡은 뿔나비들 사이에서 애벌레나 번데기로 겨울을 나고 방금 날개돋이 했을 등이 푸른 부전나비들이 날아다닌다. 청록빛 작은 덩어리가 때죽나무 겨울눈에 내려앉는다. 쇳빛부전나비다. 작년에 부엉골에서 처음 보고 올해 첫 만남이다.
어떤 존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늘 있던 자리에 있어도 알지 못했던 날들이 숱하였다. 나무가 그랬고 새와 꽃도 그랬다. 있어도 보지 못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스쳐야 인연이 된다. 몇 해 전까지도 나는 부전나비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도 작아 주위를 날아다녀도 먼지처럼 여겼다. 그 푸른빛이 내 눈에 들어온 스침 이후에야 나비를 인지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비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중이다. 쇠빛부전나비는 조팝나무 진달래 철쭉을 먹이식물로 한다. 이른 봄 온 산야에서 날갯짓하여라.
오늘도 구애 중인 청딱따구리 소리 들으며 계곡을 지나 호수를 지나 백운제에 올라 백운암으로 길을 잡았다. 진달래가 조금 아쉽게 피었더니 볕 좋은 이 길엔 풍성하다. 작년에는 꽃 피자마자 잎 나고 열매 맺더니 올핸 조금 여유도 있어 보인다. 맑은 꽃만 숭얼숭얼하다.
길을 벗어나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불이 난 흔적이 있다. 바위에 오른다. 위로는 고위봉 가기 전 내가 자주 쉬는 바위가 보이고 아래로는 불탄 자리에 진달래가 모두어 피어 있고 저 멀리로는 열암곡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바람이 불자 백운암에서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쉬어 가기에 적당한 곳이다. 앞으로 종종 애용할 내 자리 득템하였다. 길을 벗어나는 일의 즐거움까지 얻었다.
아래로 내려와 보니 위에서 보던 것보다 진달래 풍경이 더 아름답다. 불이 나 큰 나무가 없어 진달래가 빛을 독차지할 수 있었나 보다. 더욱 맑고 흐드러져 피어난 꽃의 탐스러운 미색에 홀려 한참을 즐겨 보았다.
백운암을 지나 천룡사 가는 길에는 제비꽃이 많다. 노랑제비꽃, 호제비꽃, 왜제비꽃, 흰털제비꽃, 동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제비꽃들이 피었다. 제비꽃 못 보아 제비꽃 제비꽃 노래를 불러놓고는 두어 송이 피어있는 산자고에 더 활짝 반가워했다. 벌이 꽃밥 한 덩이를 꼭 붙들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고단했을 꿀벌이 꽃잎에 폭 묻혀 잠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쉬렴.
천룡사지를 걷는다. 밥집 주변의 귀룽나무는 초록초록하다. 뒤로 벚꽃이 활짝 피어 귀룽나무 꽃 핀 듯 아름다웠다. 아직 꽃망울은 조그맣다.
천룡사지 삼층석탑과 부재석이 널려 있는 절터의 봄은 돌조차도 봄의 생기를 품은 듯하다. 이즈음 풍경이 가장 다정하고 부드러운 것이 해마다 돌 주변에 핀 작은 들꽃들이 돌의 굳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하긴 그래야 돌도 오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봄의 온기가 겨울을 지나가게 하듯 온기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나는 너른 터에 쪼그리고 앉아 쑥을 두 줌 뜯는다. 진한 쑥 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어릴 때 먹던 쑥국이 봄이면 생각난다. 깨끗하고 연하고 살진 쑥이 천지다. 금세 손톱 밑이 새까매졌다.
생각하니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데 시간이 늦어 꽃에 둘러싸인 산중의 밥집을 스쳐지나 부도탑이 있는 아래쪽으로 걷는다. 겨울에 본 부도탑은 홀로 고요하였다. 지금은 무성한 잎이 난 나무 아래에 숨은 듯 잘 보이지 않는다. 진한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는 멀리서 버드나무인가 하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세상에, 귀룽나무다. 귀룽나무는 자식을 멀리 보내지 않고 제 품 아래에서 키우는지 큰 나무 몇 그루 아래에 어린 나무들이 풀처럼 빼곡하게 자랐다. 푸른 그늘이 아름다워 이곳에 잠든 스님은 편안한 열반에 드시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꽃이 필 때에 다시 와야겠다. 귀룽나무는 벚나무속 나무로 잎 먼저 나고 꽃이 나중 피는데 그 아름다움이 푸른 들판에 쉬어가는 바람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도 쇳빛부전나비를 보았다.
열반곡으로 내려간다. 남산제비꽃과 현호색이 수놓는 길을 따라 내려간다. 임도에 이르자 산자고 싹이 자주 보이는데 꽃은 없다. 매년 그랬다. 그래서 기대를 안 했는데 어머나, 꽃 한 송이 당당하게 피었다. 옆의 꽃은 어떤 녀석이 꽃잎을 갉아먹었고 다른 한 송이는 봉오리 상태다. 토함산에 산자고도 매해 잎이 바닥을 덮고서도 꽃은 몇 년 만에 겨우 몇 송이 피더니 남산에서도 그런다. 하여간에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다. 혹시 꽃말이 뜻밖의 기쁨, 뭐 이런 건가(우리나라 토종 야생 튤립인 산자고(까치무릇)의 꽃말은 봄처녀, 가녀린 미소, 행운이 오다라 함). 뜻밖의 기쁨은 또 있었다. 꿩의바람꽃을 보았다. 남산에서는 처음 본다. 한 송이 피었는가 했는데 입을 다문 것도 몇 송이 잎은 숲 안쪽에 더 많다.
하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불쑥 피어난 꽃들이 내게 생을 긍정하게 한다. 생이 별거더냐, 이렇게 소소한 기쁨으로 삶이 때때로 충만할 수 있으면 된 것이지. 이것이 또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니 고마운 일이다. 멀리서 호랑지빠귀가 길고 단조로운 휘파람 소리를 낸다. 마을에선 제비 한 마리 지붕 위를 나는 것을 보았다. 여름새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