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사랑하여라

2026. 2. 20. 칠불암

by 풀잎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도 지나 청량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살랑거린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묵은 내를 내보내기 좋은 바람이다. 얇은 티에 얇은 패딩을 걸치고 봄 바지를 입었다. 명절 후엔 언제나 마음이 무거우니 외양이나마 가볍게 해주는 포근한 바람이 반갑다.


어딘가엔 분명 피어있을 텐데 아직 매화 한 송이 보지 못했다. 흔한 봄까치꽃도 광대나물도 올핸 웬일로 흥성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소리에서도 이른 봄을 느낄 줄 안다. 멧비둘기가 먼저 커다란 북소리로 진두지휘를 하는 것처럼 울어댄다. 귀가 둔하여 작은 새들의 소리를 일일이 구분하지는 못해도 삐이 찌익, 이런 단조로운 소리에서 쪼로롱포로롱 노래하는 소리로 변해가고 있음은 알아챈다. 전깃줄에 앉은 자그맣고 예쁜 새를 올려다본다. 방울새처럼 소리를 굴리는 너는 누구니? 묻는 순간 큰 날개를 활짝 펼친 맹금이 낮게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새들은 후다닥 나무 덤불 속으로 숨어든다. 황조롱이인지 말똥가리인지는 그저 우아하게 소리 없이 날아간다.

나는 맹금이 아닌데 두 마리 장끼가 사이좋게 숲 속을 걷다가 나의 기척을 느끼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법석을 떨다가 마치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버린다. 정말이지 장끼들은 수선스럽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방어 무기로 삼는 게 분명하다. 나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며 투덜거린다.


칠불암 가는 길이다. 초입의 나무 농장 주인은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그림을 곳곳에 그려두었다. 대나무로 만든 웃음 인형을 보고 나도 따라 함박웃음을 지어보았다. 웃음은 쉽게 전염된다. 자주 웃을 일이다. 이어지는 사과 과수원에 발을 들이자 어치 두 마리가 푸드덕 날갯짓을 하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개가 세상 떠나가라고 짖어댄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개를 다시 보아 어찌나 반갑던지 나를 보고 짖는 개에게 나는 손을 마구 흔들며 헤벌쭉 인사했다.

숲길 안까지 비질이 곱게 되어 있다. 수북이 모은 솔가리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솜 빵빵하게 넣은 쿠션 같다. 마른 솔가리 위에 푸른 솔가지를 얹어 장식까지 한 것으로 보아 만들며 무척 즐거워했을 것 같다. 누구의 솜씨일까?

나는 이렇게 단정한 것을 볼 때면 이상하게도 만든 이의 속은 얼마나 시끄러울까 생각하곤 한다. 굳이 산을 올라 솔방울로 날짜를 새기고 굳이 산길을 쓸어 솔가리를 모아 하트를 만드는 이들이 진짜 단정하게 비질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속이 아닐까. 모으고 쓸고 하는 동안 조금이나마 끓던 속이 가라앉기는 했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겠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동안 바라보고 섰는 것이다.



아직 해가 낮은 곳에 있어 숲은 그늘지다. 우중충한 겨울 색에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용히 걷는다. 솜나물 낡은 열매가 몇 개 보인다. 이 길에도 솜나물이 있었구나. 단석산에서 솜나물을 처음 보았을 때는 매우 귀한 꽃인 줄 알았다. 제법 흔한 꽃인 줄은 아주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았다. 꽃은 귀한 것보다 흔한 게 나는 더 좋다. 그래야 더 자주 볼 수 있으니까. 꽃 스스로도 그럴 것인데 그래도 사람에겐 귀한 꽃이 대접받는 법이다.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이 피어나는 시기라 안강 금곡사 계곡에 갈까 싶었지만 올해는 거르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잦은 발길이 꽃들에게 좋지는 않을 것 같아 나 하나의 발길이라도 걸러 보는 게 어떨까 싶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변산바람꽃 볼 수 있는 다른 곳들을 짚어보고 있으니 별 소용은 없는 하찮은 마음이다.


칠불암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옷을 너무 얇게 입었나 싶었는데 조금 빠르게 걷자 금세 등에 땀이 났다. 떠오르는 이런저런 잡생각들을 내치지 않고 친한 친구와 수다 떨듯이 속으로 수다를 떨며 걸었다. 멧비둘기 소리 외에는 달리 방해하는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가져본 나와의 수다였다. 엄마와 언니들 생각, 오르는 주식 시장 생각, 아이들과 남편 생각, 자발적 소외감과 어쩌다 외로워지는 마음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칠불암에 올라 부처께 인사한 후 오랜만에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곁에 머물렀다. 벌써부터 얼굴에 닿는 볕이 따가워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차르르 흘러내린 옷자락 아래로 가늘고 작은 부처의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찰랑찰랑 맑은 물가에 앉아 물장구치는 봄처녀처럼 애틋하면서도 자유로워 보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엔 무뚝뚝하게 보였던 얼굴에 오늘은 옅은 미소가 떠올라 맨발조차 다정하게 느껴지나 싶었다.


무엇이라도 빌고 싶은 마음까지 들진 않았지만 무엇도 빌지 않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엄마는 아픈 몸으로도 초를 켜러 절에 갈 것이라 했다. 초를 켜는 간절한 마음, 내겐 없는 그 마음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당신이 떠난 후에 당신을 위해 초를 켜 줄 자손을 바라는 마음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에게 내 초는 켜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는데, 나 이제 조금 철이 든 건가.


가만히 앉아 있자 가까운 나무줄기에 동고비가 내려앉아 줄기를 쫀다. 이번에도 두 마리다. 암수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으나 쌍으로 다니기 좋은 계절인가 보다. 꿩은 수컷끼리도 쌍으로 다니는 것을 보면 더욱. 바야흐로 사랑하여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홀로 능선을 넘어 산을 내려간다.


구절초 꽃이 환하였었지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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