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보다 예쁜 건 없어

2025. 11. 6. 산정호수~백운암~열반곡

by 풀잎

흐린 날 오후, 바랭이가 무성한 풀밭에는 남방부전나비들이 풀잎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풀잎 위에 사뿐히 앉아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았었다. 안개가 자욱했던 오늘 아침, 이슬 맞은 나비들이 있을까 하여 풀숲을 뒤적이고 나뭇잎 아래를 살폈으나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한기만 맞고 들어왔다. 나비들은 어디에서 밤을 보내는 걸까. 나를 피해 높은 나뭇가지에서 쉬는 걸까. 이제 곧 월동에 들겠지, 공기가 차다.

점점 짙어지는 안갯속을 달린다. 안개에 가려진 느티나무 잎이 울긋불긋하다. 못 본 사이 단풍이 들었나 보다. 어젯밤 달처럼 크고 둥근 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희미하다. 그런데 도로 하나를 건너자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온다. 용장마을엔 생동하는 햇살이 밝게 빛난다.


붉나무 붉어지고…, 2주 만에 보는 남산은 제법 가을 색을 띠고 있다. 새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활기차다. 오늘은 내내 곤줄박이가 함께해 준다. 바로 코앞까지 날아들기도 하는 것이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 같다. 딱따구리처럼 나무를 쪼아대는 습성도 여전하다.

물가 바위에 앉아 잠깐 쉬는데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산신령인 줄 알았다며 놀란다. 그러고는 송이 캐러 다니는 거 아니냐고 물어서 송이를 잘 모른다고 하니 단수가 높다며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턱도 없는 오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유쾌하다. 그런데 대체 송이는 어디에 있는 건지 내 눈에는 독버섯만 보인다.


조록싸리가 열매를 대롱대롱 달았다. 열매껍질을 벗겨보니 아니 글쎄 작은 강낭콩 모양 씨앗이 들어있는 거다. 싸리나무가 콩과지만 워낙 열매가 먼지처럼 보잘것없어 이렇게 깜찍한 씨앗이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싸리 씨앗도 궁금해진다. 찾으니 잘 보이지 않는다. 한참 나중에 만난 (참)싸리 열매도 조록싸리랑 비슷하게 생긴 것을 확인했다. 아, 이래서 작은 새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열매를 쪼았던 거구나. 싸리가 달라 보인다.


조록싸리 /(참)싸리 열매와 씨앗


씨앗을 모두 내보낸 제비꽃 빈 깍지 옆에 폐쇄화에서 맺은 걸로 보이는 열매가 꼿꼿하다(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제비꽃은 반대다). 아주 빵빵한 것이 씨앗이 빼곡할 것이다. 제비꽃도 폐쇄화를 피우는 대표적인 식물이다. 위기를 느낄 때 식물은 종족을 번식하고자 자가수분을 한다. 굳이 꽃잎을 열 필요도 꿀을 만들 필요도 없다. 개방화에서 맺은 열매보다 건강하지는 못할지라도 많은 씨앗을 만들 수는 있다. 최소의 에너지로 어떻게든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제비꽃의 전략이다. 식물의 위기 대응력은 뛰어나다.


가끔씩 당단풍 붉은 단풍이 눈에 선연히 들어온다. 올핸 흐린 날이 많아 붉기보다 노랗게 물드는 단풍이 많다. 노란색 색소 카로티노이드는 원래 잎 속에 있던 색소가 드러나는 것이고 빨간색 색소 안토시아닌은 낮은 기온과 강한 햇빛이 합성을 촉진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풍경일 것이다. 붉은 단풍을 보니 마음이 들썩인다. 같은 나무의 이파리라도 햇빛을 듬뿍 받은 곳의 단풍은 그 색이 더 맑고 곱다. 영양이 좋고 스트레스가 없어야 나뭇잎도 자신의 생을 아름답게 마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와도 햇살 비추지 않으면 붉음도 칙칙하다. 햇살보다 예쁜 것은 없다. 붉은 당단풍과 노릇노릇 개옻나무 잎과 초록한 청미래덩굴 이파리가 햇살 속에서 찬란하다.


제비꽃 폐쇄화


산정호수를 지나 백운재에서 백운암으로 간다. 백운암 옆 햇살 좋은 터에 생강나무 노란 단풍이 참으로 눈부시다. 키가 작은 생강나무는 그늘에서 자라 대부분 잡티가 많고 탁한 갈색으로 물드는데 저 높은 곳의 생강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 보송보송 부드러운 햇살을 한 뭉치 커다랗게 뭉쳐놓은 것만 같다. 따사롭다.

백운암에서 천룡사로 다시 천룡사지로. 빈터엔 햇살이 가득하고 꽃밭에는 천일홍이 가득하다. 어슬렁어슬렁 햇살 밟기를 하다 녹원정사에 들어가 밥을 먹는다. 앞선 객이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는 소리를 들어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맛있어 또 과식하고 말았다. 김치 조각 조금 들어간 비지찌개는 어찌 매번 맛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맛있다.

천룡사 터 빈 의자에 앉아 시를 몇 편 읽다가 의자에 누워 바라보이는 감나무에서 말갛게 익어가는 홍시를 세다가 깜박 졸다가 까마귀와 까치가 다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열반암으로 내려가다 청보라색 깊은 투구꽃을 만나 역시 들꽃길이라 칭송하고 바지런한 다람쥐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왔다.


백운암에서
투구꽃








월, 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