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찬란한

2025. 10. 24. 철와곡~국사곡

by 풀잎

아주 오랜만에 아침놀을 보았다. 청회색 하늘을 가로지르는 분홍색 구름이 생물 시간에 배운 편형동물 플라나리아를 닮았다. 몸통을 잘라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플라나리아처럼 오늘의 구름도 재생 능력이 뛰어나 하늘은 다시 구름으로 덮였다. 기대가 또 무너진다. 시월 들어 종일 맑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흐린 날도 좋아'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수확하지 못한 벼 이삭의 낟알에서 싹이 난다고 하니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는 농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리는 조금씩 가을 색으로 물들고는 있다.


통일전 주변의 나무들은 다른 곳보다 제법 단풍이 들어 가을 느낌이 난다. 유명한 은행나무 길은 아직은 조용하다. 붉어지는 단풍나무 옆 감나무로 새 한 마리 날아든다. 인디언 추장 깃을 세운 후투티다. 직박구리들이 소란을 떠는 동안 구경꾼이 된 후투티를 내가 구경한다. 지박령이 되려는지 나뭇가지에 붙박인 후투티를 지켜보다 마을 길을 걷는다. 가끔은 산보다 마을 길을 걷는 재미에 길을 잡는 날이 있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것 같다.


가늘게 빗방울이 떨어진다. 물먹어 짙어진 담장 위에 얹힌 기와를 본다. 두 뼘 크기의 기와가 이끼에게는 대륙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먼 대륙으로 여행을 떠난 듯 혹은 대륙의 미니어처를 보듯 그 크고도 작은 세계를 바라본다. 빗방울이 마냥 반가운지 봄날의 제비 새끼처럼 하늘을 향해 키를 키운 삭(포자낭)이 어느 꽃보다 예쁘다. 초록초록한 이끼 마을을 지나면 흐린 옥색의 지의 마을이 나타난다. 슈렉의 귀처럼 생긴 지의가 모여있는 마을이다. 아이에게 보여줬더니 누가 슈렉을 땅에 파묻었냐고 한다, 허걱! 꼬마요정컵지의, 이름은 예쁘다. 이끼와 지의가 어울려 사는 마을, 바위솔이 자라는 마을, 나는 기와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아기)풍경이끼


투둑, 쌓인 눈이 녹아 떨어지는 것 같은 물소리가 난다. 지붕 위에 고였던 물이 넘쳐흘렀나 보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하늘 위로 새무리가 지나다 전선에 내려앉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제비다. 뾰족한 엉덩이를 들이밀고 귀여운 척을 한다. 캉캉 춤을 춰도 될 것 같아. 저편에 맹금이 나타나자 우르르 날아간다. 나도 골목을 돌아 나와 산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어디선가 진하고 달콤한 향이 훅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본다. 서양산딸나무 붉어진 담장 안에 얼핏 금색 꽃이 보인다. 내 키로는 담장 안이 잘 보이지 않아 깡충깡충 뛰었다. 금목서다. 향이 은목서와 비슷할 줄 알았더니 전혀 다르다. 오히려 가을 계수나무 잎에서 나는 달고나 냄새와 닮았다. 향을 맡자 기분 좋은 웃음이 피식피식 샌다. 감미로운 향이 멀리까지 퍼지는 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간다. 철와곡으로 오르는 것은 오랜만이다.


흔한 버섯 무리들 외에 특별할 것 없는 길이다. 계곡에 물이 많지는 않다. 내내 흐리고 비였어도 양이 많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큰도둑놈의갈고리 열매는 짝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외알 색안경이 되었다. 여전히 푸른 숲에서 새머루는 빨갛게 단풍 들고, 생강나무는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벌써 겨울눈은 통통하다. 낙엽 중에 은은하게 물들어 반짝이는 잎은 감태나무 잎이다. 은사시나무 이파리는 떨어져 시커먼 숯이 되었다.


꼬마요정컵지의


빗줄기가 굵어진다. 금오정에 올라 비를 그을까 하였는데 먼저 온 아이들이 있다. 옷을 둘러쓰고 바위에 앉아 쉰다. 잠시 후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 아이들이 나타나 정자에 있는 친구들과 인사한다. 산이 떠나갈 듯 시끄럽다. 마을에서는 고양이들이 영역 다툼을 하는지 요상한 소리를 내더니, 하!

점점 많은 학생들이 올라온다. 감포에서 온 고등학생 들이란다. 와, 와~ 풍경에 감탄하는 소리들과 힙합을 부르는 아이까지, 거침없는 소리들이 즐거우면서도 소란스러워 나는 자리를 일찍 뜬다. 국사곡 4사지 삼층석탑 쪽으로 내려간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개옻나무 단풍과 바닥에 깔린 갈색 노랑 낙엽에 마음이 설렌다. 단풍들었다 하기엔 민망할 정도인데 무엇이 나를 설레게 하나. 나는 나뭇잎의 한 생을 떠올려 본다.

봄의 나무는 각각의 색으로 잎을 낸다. 초록은 동색이라도 봄엔 나무마다 색감이 천차만별이다. 어린잎의 개성으로 멀리서도 어렵지 않게 어떤 나무인지 알아볼 수 있다. 올괴불나무는 솜털 보송보송, 때죽나무는 연둣빛 나비 같고, 감태나무는 붉은 테두리 두른 초록색 양갱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여름이 짙어질수록 잎은 모두 비슷한 암녹색이 된다. 특색 없는 이들 나무의 잎을 멀리서 알아보기는 어려워지고 만다. 바야흐로 먹고사는 일이 바쁜 시기라 자기를 내세우지 못할 때다. 그렇게 제 색을 내지 못했던 잎은 가을이 되면 드디어 고단했던 노동에서 해방된다. 마지막 힘을 모아 제 속에 감춰두었던 제 빛을 드러내고 영원한 쉼으로 돌아간다. 생의 쓸쓸함이 찬란하여 쓸쓸함의 길목에서 나는 설레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쓸쓸한 생도 찬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석탑을 보며 부족한 쉼을 더 누리다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길 이곳저곳을 더 걸었다. 길목을 떠도는 금목서 향은 아찔하였고, 돌담의 담쟁이와 낙과하는 모과나무는 내게 가을을 안겼다. 비는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월, 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