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성취

2025. 10. 1. 무장산

by 풀잎

무장산 들머리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까마귀들이 땅바닥에 내려와 노는 아침이다.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퍼덕퍼덕 날아 전선 위로 옮아간다. 서로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먼 숲에서는 새들끼리 싸움이라도 났는지 비명소리가 하늘을 찢는다. 풍성한 가을에 왜 싸움질이고, 까마귀들의 대화 주제는 그것인지도 모른다.


명아주로 지팡이(청려장)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 어리고 연한 쑥이 어떻게 황량한 쑥대밭이 되는지도 궁금했다. 쑥도 명아주도 내버려 두면 어린 나무처럼 쑥쑥 자란다는 것을 가을이 되어서야 알았다. 줄기가 가늘긴 해도 단단해 얼핏 보면 나무 같다.

길가에 명아주가 숲을 이루고 섰다. 너무 촘촘하여 지팡이 만들기엔 약하게 자란 것 같지만 대숲처럼 청량한 바람이 드나드는 숲은 이룬 것 같다. 명아주의 놀라운 변신.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삶을 사는 것인데 그 삶의 전체를 알지 못했던 나에게 놀라운 변신으로 보일 뿐이다.



가을이 되어 키가 쑥 자란 명아주 / 배풍등 열매


드문드문 벚나무 붉어졌을 뿐 숲은 아직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 푸른 잎 위로 붉게 피어난 것이 가을꽃인가, 층층나무의 열매 줄기가 붉어져 꽃처럼 보인다. 동그란 열매는 까맣게 익었다. 물렁해 보이지만 앵두처럼 단단한 핵과다.

땅에도 빨간 열매가 꽃인 양 열렸다. 배풍등이다. 덩굴성인데 타고 오를 식물이 없자 바닥에 늘어져 있다. 여름엔 꽃잎을 휙 뒤로 젖혀 당돌한 매력으로 가을부턴 맑은 빨강 열매로 눈길을 사로잡는 식물이다. 맛이 궁금하여 한 알 먹어보았다. 첫맛은 아무 맛이 없고 끝 맛은 쓰다. 자잘한 씨앗은 씹지 않고 뱉었다. 독성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고, 풀이라고도 했다가 나무라고도 했다가 상반된 정보가 난무한다. 겨울까지 고운 상태로 열매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독성이 있을 것 같고,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치명적) 독성은 없을 것 같다. 열대지방에서는 원래 나무였다가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풀이 되었다 하니 원래 자기 모습을 찾아 나무가 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천남성은 자라는 동안 성전환을 하기도 하고 감태나무는 암그루 혼자 열매를 맺는다. 식물의 욕망과 상상력은 상상 이상이다.


참회나무 붉은 열매 아름답게 늘어지고, 이고들빼기 노란 꽃엔 줄나비가 내려앉고……, 어, 맑은대쑥 꽃에서는 등에가 꿀을 먹나? 쑥 꽃은 풍매화라 색도 칙칙하고 보잘것없이 피는데 산길에서 자주 보는 맑은대쑥은 노란 색감이 제법 예쁘다. 쑥도 다른 국화과 식물처럼 충매화로 진화하다가 그만두고 풍매화로 전환하였다 하는데 맑은대쑥에 앉은 등에가 그 흔적을 발견했나 보다. 나름 예쁜 꽃과 등에를 신기하여 한참 보았다.


맑은대쑥 꽃에 등에

큰도둑놈의갈고리와 도둑놈의갈고리가 한 곳에 나란히 있다. 큰도둑놈은 잎이 5~7장이고 열매가 크다. 도둑놈은 잎이 3장이고 열매는 작다. 이 둘을 비교하고 일어섰는데 그새 옷 여기저기 열매가 달라붙었다. 선글라스 같은 열매 끝 갈고리도 그렇지만 껍질 전체에 털이 나 찍찍이처럼 들러붙는다. 식물은 뛰어난 전략가다. 우습지만 너의 의지를 존중하여 한참 달고 가다가 떼어낸다.


전략가 식물도 좋지만 나는 맛있는 식물이 더 좋다. 가을이라 으름도 벌어지고 산밤도 굴러다니고 다래도 구른다. 다래를 몇 개 주웠다. 씻을 데가 없어 껍질을 살살 벗기는 중에 반으로 갈라지며 속이 드러났다. 영락없는 키위다. 맛있게 먹었다. 가을이라 억새 보러 오는 산객이 많다. 다들 나를 앞서간다. 나는 걸음이 좀처럼 빨라지지 않는다.


겨우 계곡을 벗어나 돌아드는 길목에서 푸른 열매를 보았다. 나무에 가득 열렸다. 아, 아! 노린재나무 열매다! 입을 벌리고 섰다가 좋아서 방방 뛰었다. 정말 기대도 안 했는데 소원성취하였다. 그동안 노린재나무 열매를 보려고 여름부터 열매 맺은 나무를 점찍어 놓고 가을이면 살피기를 몇 해던가. 열매를 가득 맺었다가도 가을이면 온데간데없었다. 겨우 몇 개가 다였다. 얼마나 감질나던지. 어쩌다 이 청람색 열매에 반해서는. 그런데 이런 날이 오는구나. 조금은 못생긴 데다 벌레도 먹었지만 푸른 색감만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더 많이 더 건강한 열매를 단 나무를 위에서 또 만났다. 오늘 운수 대통, 진짜 기분이가 좋다.


이때부터 남은 길은 그저 모든 게 좋았다. 정상의 억새는 썩 좋지 않았으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파란 하늘에 억새 몇 줄기만으로도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개쑥부쟁이 무리 지어 핀 곳에서는 각종 나비들이 회합을 하다 나를 만나 화르르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고, 미국쑥부쟁이와 개쑥부쟁이 어울려 서로 아름답고, 구절초엔 발그레한 분홍색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도둑놈의갈고리 / 큰도둑놈의갈고리
다래
개쑥부쟁이(큰 꽃)와 미국쑥부쟁이(자잘한 꽃)
무장산 억새
노린재나무 열매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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