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19. 선도산
명자나무 열매가 뚝뚝 떨어져 있다. 익은 감도 떨어져 질펀하다. 들녘의 색도 노르스름 변해 가고 벚나무도 드문드문 노랗다. 날이 흐려 그런지 몸이 무겁다. 모처럼 부전나비들은 활발하다. 보희연못에서 큰주홍부전나비를 따라 물가로 내려갔다가 파대가리와 사마귀풀 꽃을 만났다. 파대가리라니, 거 참 파꽃을 본 눈이 이름은 험하게도 지었다. 파대가리는 동글동글 꽃차례는 귀엽고 녹색 줄기는 시원한 습지식물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고마리 꽃인 줄 알았던 사마귀풀은 어디를 보아도 사마귀를 닮지 않았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짙어지는 연분홍 잎에 짙은 자주색 수술과 투명한 보라색 수술이 단아하게 예쁘다. 식물체의 즙을 피부에 난 사마귀에 바르면 혹이 없어진다는 약효 때문에 사마귀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영양이 부실했던 시절 얼마나 이 풀을 애용했을지 짐작이 된다. 여하튼 둘 다 이름은 좀 거시기하지만 보기에는 좋다.
서악 고분군을 뒤로하고 꽃무릇 줄기가 솟아나고 있다. 화려한 꽃보다 새순 돋듯 올라오는 연두색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땅에서 빛이 피어나는 것처럼 눈이 부시다. 새잎 돋는 봄숲에 연둣빛 비가 내리면 저러한 느낌일까. 지난겨울 보았던 빽빽한 잎은 흔적도 없다. 상사화처럼 잎과 꽃이 만날 일 없이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 겨울을 푸르게 날 것이다.
이제는 꾀꼬리도 떠난 것 같은데 막바지 여름 기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흐른다. 무거운 다리로 느적느적 걷는다.
호랑나비 번데기를 처음 보았다. 스스로 집을 짓고 그 속에 저를 가두고 새롭게 태어나는 애벌레의 놀라운 능력이다. 곤충에겐 예술과 철학의 DNA가 있는 것 같다. 변화를 위한 멈춤의 시간을 지낸 후 혁명보다 더한 변화를 마주하는 것, 매우 놀랍지 않은가. 인간인 나는 외피는 변화시키지 못해도 내면의 혁명은 꿈꿔야 하려나. 어쩌면 산을 걷는 것이 내게는 그러한 시간인 것도 같다. 느리고 고요한 변화.
당잔대 꽃줄기에 원래 가시가 있었나?, 하고 보니 베짱이 다리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수직으로 높이 세웠다. 하늘과 교신 중인가. '사람 출몰, 어떡해야 하나요?' 무시하라는 응답을 받았는지 날아가지 않는다. 베짱이라 배짱이 두둑한 건지도 모르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오른다. 웬일로 사람이 많다. 홀로 온 젊은 여자 둘과 성모사 관리인 모자와 문화유산 답사객 한 무리를 만났다. 이들이 없던 시간 성모사엔 나비가 많았다. 나무 그늘이 짙은 어둔 곳에서는 먹그늘나비가, 햇살 환한 마애여래 발아래엔 뾰족부전나비가, 앞마당엔 잠시 청띠신선나비가 다녀갔다. 호랑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처럼 흔한 나비들은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먹그늘나비 쫓아다니다가 모기에 된통 물렸다. 흔한 나비들 나를 꼬방시다 했겠지. 그러나 뭐 모기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안 그래도 작년에 용장골에서 처음 본 뾰족부전나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용장골에 갈까 하다 날이 흐려 선도산엘 왔는데 이곳에서 이 나비를 볼 줄이야. 물린 곳이 가려워 벅벅 긁으면서도 기뻐서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뾰족부전나비는 은빛 날개를 접었을 때 뾰족한 날개의 선이 매우 아름답다. 날개를 펴면 짙은 밤색 바탕에 주황빛 먹을 듬뿍 발라놓은 듯한 날개가 화려하다. 오늘 만난 녀석들은 모두 수컷이었다. 수컷을 실컷 보았더니 이제 등판이 밤색에 은빛인 암컷을 만나고 싶다. 나도 그렇지만 수컷들은 더하지 않을까. 이렇게 성비 균형이 맞지 않아서야 수컷들 경쟁이 치열하겠다. 암컷도 고단하겠다. 나는 산 아래에서 그 치열한 현장을 목격하고야 만다.
산객들이 다 내려갈 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청띠신선나비는 다시 오지 않았다. 맥문동 맑은 초록 열매와 만두 빚는 손끝처럼 맵시 좋게 빚은 하늘말나리 열매와 앙증맞은 인동덩굴 열매와 새콩과 나비나물 꽃을 지나 내려간다. 도둑놈의갈고리 꼬투리가 어느 결에 소매 끝에 묻어 달려왔다. 한참을 이동시켜 준 것 같다.
올라갈 때도 능 예초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산을 다녀올 때까지도 기계 소리 요란하다. 능의 부드러운 곡선과 곧게 나란한 꽃무릇 줄기를 찍으려는데 작업하는 분들이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소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사람 풍경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찰칵찰칵 사람을 담았다.
꽃무릇은 아직 대부분이 꽃망울 상태다. 드문드문 활짝 꽃 핀 곳에서는 호랑나비가 꿀을 빨고 있다. 나는 색이 너무 강렬하고 화려하여 꽃무릇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줄기부터 반한 오늘은 꽃에도 자꾸 눈이 간다. 꽃을 따라 걷다 보니 한 곳은 꽃이 모두 활짝 피어 있었다. 호랑나비 한 마리 사람을 무시하고 꿀 먹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 나비는 다른 나비들도 다 무시한다. 식탐이 무시무시하다 생각하며 지켜본다.
와~ 많게는 예닐곱 마리의 나비들이 이 식탐 나비에 달려든다. 가만 보니 다른 나비들은 꿀에 관심이 없다. 식탐 나비를 탐낸다. 한참을 지켜보고서야 깨달았다. 이것은 암컷 한 마리를 두고 벌이는 수컷들의 전쟁이란 것을.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나비들은 아무래도 수컷, 그들이 몰려들어 식탐 나비에 치근댄다. 암컷은 그러거나 말거나 꽃을 옮겨 다니며 꿀만 빤다. 수컷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추근대다 싸우다 난리도 아니다. 이 치정 난투극이 어느 수컷의 승리로 끝이 날지 궁금하였으나 쉽게 끝나지 않아 보지 못했다. 너희도 사는 게 만만치 않구나. 그나저나 너도 암컷이니? 호랑나비 한 마리 능소화 꽃에 머리를 폭 파묻고 나올 줄을 모른다. 아, 철학과 예술의 DNA는 결국 (유전자 계승 욕망을 포함한) 생존에 무너지고 마는가. 그럴리가. 나비의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이다. 어야든동 짝짓기가 성공했기를 기원한다.